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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중반에 집권 2년차를 맞이한다.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라는 국정철학을 내세운 정부는 촛불시민의 뜻을 받들어 나라다운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로 다시 세우려 애쓰고 있다. 출범 7개월을 넘겨 새해를 맞으면서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와 혁신의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질 것이다. 6월3일 치러질 지방선거가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면서 정부와 여당은 물론이고 야권도 승리가 절실하다. 새 정부는 적폐청산과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고 국정과제 추진에 힘을 얻을 수 있으니 개혁의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승이 필요할 것이다. 보수야당도 지리멸렬한 보수층 결집을 위해 선방이 필요하다. 소수정당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합집산의 정계개편을 꾀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입법지형에서 개혁은 대통령 뜻대로 되지 않는다. 국정과제 실현을 위한 중점 법안은 상당수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12월 임시국회 내내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연장을 둘러싸고 정쟁으로 허송세월하다가 겨우 몇 건의 민생법안 처리로 밥값을 하긴 했다. 헌법개정특위와 정치개혁특위 활동 기한을 6월까지 연장하기로 했고, 입법권을 가진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안건도 통과되어 법원·법조·경찰개혁소위원회와 검찰개혁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빈손국회의 위기에서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을 자격은 얻은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수히 많은 법안이 쌓여 있다. 임시국회 마지막에 처리한 안건을 제외하더라도 20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이 70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국정원 개혁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 등 핵심 개혁 법안은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누구 탓일까. 입법의 홍수 속에서 시간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탓이다. 법안의 체계와 자구를 정비하여 위헌 소지도 없애고 법률다운 법률을 만들기 위한 최후 보루인 법사위가 붙잡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상원 역할을 부여받은 법사위가 상임위원회에서 여야가 깊이 논의하여 합의한 법안도 ‘체계·자구심사권’을 무기로 잠재우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법 제86조에 따라 법률안을 각 상임위에서 심사를 마치거나 입안할 때에는 법사위에 회부해 체계와 자구에 대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1951년에 도입된 이 제도는 법안의 내용이 여러 상임위와 중복되어 있거나 방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법안을 법사위에서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게 되면 법안의 완결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거쳐야 할 절차다. 소급입법금지의 원칙, 명확성의 원칙, 과잉금지의 원칙 등 위헌소지를 걸러내는 입법절차이기도 하다. 그러나 쟁점법안의 경우 법안 통과의 마지막 관문인 법사위에서 여야가 이해관계 대립으로 정치적 공방을 벌이면 입법이 지연되거나 막혀버리게 된다. 다른 상임위에서 통과된 법안의 심의·의결을 마냥 미루거나 법안의 내용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법사위에 모인 법안들을 여야가 협상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사위가 입법마비의 진앙이자 블랙홀이라 불리는 것이다. 다른 상임위에서 통과된 법안이 법사위에 몰리면서 업무과중으로 병목현상이 생기기도 하지만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이유로 법사위 전체회의를 열지 않으면 본회의에 올라오지도 못한 채 입법권은 잠자게 된다.

국회법 제86조를 개정해야 한다. 이를 악용하는 법사위가 법안처리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국회 안의 갑질 횡포다. 국회에 법률전문가가 드문 시절에 도입된 이 제도는 입법의 비효율성을 낳기도 하지만 입법부가 법안심사를 빌미로 행정부를 괴롭히는 도구로 남용되고 있다. 법사위 법안 처리 과정에서 해당 법안과 관련이 있는 국무위원들이 모두 법사위에 출석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가 국회법 개정안을 조만간 발의하기로 했다. 민생·개혁 발목 잡기 수단으로 변질된 법사위의 체계·자구심사권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제1야당이 맡고 있는 법사위원장의 몽니로 회기마다 반복되는 입법정체 현상을 막아야 한다. 정권이 교체되고 여야가 바뀔 때마다 발생하는 적폐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도 19대 국회에서 법사위의 월권적 심사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추진한 바 있고, 2015년에는 국회 법사위의 기능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지금의 야당도 여당시절에, 지금의 여당도 야당시절에는 각각 발목 잡기의 주역이었기에 누구 탓만 할 것은 아니다. 여야가 공수 교대될 때마다 주장하는 바가 같다면 법 개정의 필요성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언론에서 게이트키퍼가 사전검열로 기능하면 안되듯이 법안의 게이트키퍼인 법사위가 더 이상 거름망 이상의 월권을 행사하는 상임위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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