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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의자

opinionX 2018. 1. 2. 11:32

1951년 7월10일, 한국전쟁을 멈추기 위한 휴전 협상 첫 본회담이 개성 내봉장에서 열렸다.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 대표단은 북한군 대표단의 앉은키가 커 보인다는 걸 알아챘다. 북측이 유엔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16㎝) 정도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마치 승자가 패자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연출하기 위한 꼼수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이 분야의 전문가다. 지난달 14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도쿄 총리 관저를 찾았을 때, 아베가 앉은 의자는 홍 대표 의자보다 높았다. 아베는 앞서 지난해 6월 정세균 국회의장이 방일했을 때도 낮은 의자를 배치하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정 의장 측이 미리 알고 ‘그렇게 하면 안 만나겠다’고 해서 같은 높이 의자로 교체했다고 한다.

헌법재판관 9명이 앉는 의자가 연갈색 가죽의자로 교체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모습. 헌법재판소 제공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중략)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후략)”(문정희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이 노래한 ‘큰 사무실 한켠에 놓인 의자’는 ‘공부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의 현 위치를 보여준다. 의자는 권력, 위계, 서열의 상징물이다. 평사원과 과장의 의자, 부장과 임원의 의자가 다르다. 회전의자는 그저 ‘앉는 자리를 좌우로 돌릴 수 있게 만든 의자’가 아니며, 흔들의자는 1970~1980년대 부잣집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였다.

헌법재판소가 대심판정의 헌법재판관 의자를 모두 교체했다. 붉은색 등받이에 무궁화 문양의 휘장이 새겨지고 등받이 끝이 높이 올라온 목각 의자 9개는 헌재 창립 이후 30년간 대심판정을 지켜왔다. 이를 교체하게 된 데는 ‘탈권위’를 지향하는 헌법재판관들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한다. 별도로 주문 제작하지 않고 시중에서 구입해온 의자는 부드러운 느낌의 가죽 재질이다. 등받이 높이가 낮아졌고, 헌재 휘장도 새기지 않았다.

업무환경이 달라지면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2018년 새해, 더 낮은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일하는 공직자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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