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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한국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내가 최초로 배운 교훈이 있다. “강한 아줌마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한국에서 발견한 ‘아줌마’라는 개념은 아주 독특한 것이었다. 대개 뽀글뽀글 파마 머리를 한 아줌마들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진리를 증명해주었으며, 사람이 많은 데서도 몸으로 밀며 앞으로 전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할인 혜택을 사랑했다.
나 역시 아줌마가 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아줌마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 눈이 파란 외국인 남자임이 명백한 내 겉모습만 보고 나를 아줌마로 짐작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믿어주시기를. 이제 내 안에는 아줌마가 산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 “벌은 꿀이 있는 곳에 모여든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다정하게 예의를 갖춰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곧 이 방식이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처음 서울에서 택시를 탔을 때 택시 운전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말로 이렇게 말했다. “거기 안 가!” 어떤 택시 운전사는 우리집 앞까지 가기 귀찮다며 나를 엉뚱한 곳에 내려주기도 했다. 나는 예의를 갖춰 웃는 얼굴로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소심한 나를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방도를 발견했다. 바로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아줌마 정신’이 그 해답이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아줌마가 어깨로 사람들을 밀치며 줄을 헤쳐나가는 광경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마침내 자리를 차지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아줌마는 근성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곧 나는 다른 깨달음도 얻었다. 어쩌면 아줌마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른다고. 힘들었던 1960~1980년대를 헤쳐나온 아줌마들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려는 호랑이들처럼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그런 전투 태세를 갖춰야 했던 건 아닐까. 아줌마들은 사실 다정다감하고 따뜻했으며, 언제나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집 밖에서 마주쳐야 하는 세상은 으르렁대는 포식자들이 가득하고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을 테니 ‘아줌마의 탄생’도 당연한 결과 아니었을까.
나 역시 의도적으로 아줌마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국 사회에 조금씩 스며드는 동안, 아줌마 정신이 서서히 내 안에 침투했다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내 마음속 아줌마는 항상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몫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내 안에서 속삭였다.
언젠가 한번 식당에서 잘못된 요금을 청구했을 때 나는 소리 높여 매니저를 찾았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계산서가 잘못됐다고 말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누가 나를 밀칠 땐 나도 상대방에게 똑같이 그렇게 했다. 그렇게 아줌마 정신으로 무장했더니 그간 마주했던 이런저런 곤경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줌마 정신’이란 말은 슬프다. 왜냐하면 그 말은 곧, 우리가 항상 동료인 인간을 믿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늘 칼을 뽑을 준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앞에서 말한 택시 운전사와 식당 주인이 나를 무시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루하루가 고단한 그들에게는 나의 정당한 요구조차 너무 벅찼을지도 모른다. 아이들 교육비는 나날이 치솟고, 주택담보대출도 갚아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부디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 친구들이 내게 보내준 따뜻한 정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고강도 스트레스를 견디며 일하는 한국인 친구들이 나에게 보내주는 따뜻한 배려를 깨달을 때마다 나는 놀라곤 한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하지만 매일매일의 밥벌이를 위해 차가운 세상과 맞장떠야 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아줌마 정신’으로 무장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은 우리 마음을 그렇게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제프리 케인 | 글로벌포스트 한국 수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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