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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촛불집회에서 중고생들이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는 플래카드를 들고나왔다. 중고생의 패기와 치기, 그리고 생경함을 동시에 느꼈다.

‘혁명’은 사회변화에 대한 열망을 집약하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혁명이라는 표현이 점차 담론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20세기 혁명을 대표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대부분 비인간적 체제로 귀결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혁명이라고 하면 새로운 사회의 건설보다 폭력과 파괴가 지배적 이미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담론에 다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중고생의 구호는 현재 상황을 혁명과 연결시키며 이러한 생각에 문제를 제기해 주었다.

‘중고생연대’ 소속 회원 등 10대 청소년들이 서울 보신각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정지윤 기자

혁명이 무엇인가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이라는 책에서 혁명은 해방을 넘어 ‘자유’(사적인 자유와 구분되는 공적·정치적 자유)를 확립하는 과정임을 강조했다. 미국 혁명의 타운홀 미팅, 러시아 혁명 초기의 평의회 등 자유를 확장시키는 공간의 형성을 혁명의 핵심으로 보았다.

현재 전개되는 상황은 국가를 급진적이고 전면적으로 개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렌트적 의미에서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무엇보다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 광장은 공적인 자유가 실현되고 진전되는 장이기도 하다. 연령, 사회적 위치 등과 관계없이 모두가 떳떳하게 자신의 주장을 외치고 있다. 유례가 없이 평등한 정치적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 번의 시위가 과연 혁명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만도 하다. 광장이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하는 공간은 아니라는 점, 따라서 바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그러나 이미 이룬 것도 많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국정혼란을 우려하고 있으나, 현재 우리는 심각한 국정혼란을 극복 중이다. 박근혜 정부의 온갖 비행이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특히 박근혜 정부는 최근까지도 강경한 대북정책을 내세우며 남북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지금 광장의 정치는 박근혜 정부의 무모한 행동에도 제동을 걸고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큰 해방적 의미가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번 광장의 정치가 일과적인 것이 아니라 멀게는 1987년 6월항쟁, 가깝게는 2009년 촛불집회와 이어지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한국적 실천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지만, 시민이 참여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표출시킬 수 있는 공간은 꾸준히 확장되어 왔다.

이번 촛불집회는 6월항쟁보다도 시민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태도에 더 크고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당시 국민 중 다수는 정치권에 기대를 걸었다. 광장의 에너지가 정치권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민들은 정치권에 할 일을 요구하고는 있지만 정치권에 문제해결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다.

정치권은 사태 초기부터 빠른 수습책을 먼저 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광장의 목소리는 빠른 수습책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일관되게 요구해왔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더라도 4·19 이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광장의 정치는 소멸되지 않고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계속 작동할 것이다.

혁명을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변화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혁명적 과정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장기 혁명’이고, 한국적 혁명이다. 우리 국민이 혁명적 공간과 상황을 만들어,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따른 민주적 공간의 축소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또 이를 확장시켜왔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이러한 정치적 실천이 어떤 구체적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단기적 결과만을 갖고 광장의 정치를 평가하려는 태도는 사태를 오도하기 쉽다. 더구나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대한 변환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이 시점에 우리가 원하는 큰 변화가 무엇인지를 찾고 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혁명적 의미를 갖는다. 다가오는 26일 촛불집회도 이 장기적 과정의 하나라는 생각으로 임할 일이다. 그러한 태도가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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