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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이호준·이청솔기자
ㆍ“거대담론·운동권 구호… 서민 삶과 괴리된 느낌”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와 시민 사이의 불통현상은 운동권식 언어와 투쟁 방식, 하향식 사업 등 고답적인 운동이 주 요인으로 지적된다. 사진은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이 지난 1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개최한 국민대회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 주최의 범국민대회 때 나오는 구호들을 보면 ‘민주주의 회복’이나 ‘국정기조 전환’ 같은 겁니다. 현 시국에서 당연한 요구이지만 국민들이 얼마나 절박한 문제로 받아들이냐는 문제는 남습니다.” 민주노총 우문숙 대외협력국장의 말이다. 비정규직·저임금의 고용 불안, 사회복지의 급격한 축소, 대규모 청년실업, 자영업자 몰락의 상황에 진보세력이 제대로 대처하고 있느냐는 자문이자 자성이다.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와 시민들에게도 불통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진보적 시민단체 압박, 조직의 근간을 뒤흔든 몇몇 진보단체의 스캔들도 시민과의 소통 장애를 일으킨 요소로 꼽히지만 운동권식 언어와 투쟁 방식, 시민과 동떨어진 하향식 사업 등 고답적인 운동이 불통현상을 불러오는 주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치에 매몰 ‘시민없는 시민운동’
불통의 이유로 우선 거론되는 것은 ‘거대담론’이다. 회사원 한모씨(37)는 “진보단체들에 진정성이 있다고는 보지만 집회·시위 현장에서 나오는 구호, 성명을 보면 너무 추상적이고 내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의 소통 특집기획 설문에서 ‘진보진영이 버려야 할 문제점’ 중에서 ‘이념 중심적 태도’가 가장 많이 꼽힌 것도 ‘거대담론’과 무관치 않다. 진보진영에서는 최근 수년간 경제발전 등 성장 담론을 내놓고 있지만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상진 서울대 교수는 “우리 사회의 본체를 이루는 일반 서민들이 경제적으로 더 좋아지고 권리를 좀더 향유할 수 있으려면 진보도 우리 사회 내부의 현실에 밀착된 수준에서 개혁의 과제를 추구하고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진보진영은 마르크스주의 등 서구의 이론·개념을 갖고 피상적 수준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념’의 문제를 달리 보는 시각도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같은 사회단체는 집단의 이익을 이념에 따라 구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념 지향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민주노총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 문제에 집중해 노동운동 중심으로 가고 전교조도 교육운동에만 매진해야 하는데, 이들 단체가 통일운동, 민족 문제까지 이슈를 확장하니까 소통 문제에서 노동자·시민과 괴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민주노총의 경우 오히려 입에 칼을 물고 해나가야 할 이슈는 비정규직 문제”라고 했다.
대학원생 신모씨(38)도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노조를 보면 남성,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의 이해관계에만 중심을 둔다. 특정계급의 이해관계에 치중돼 있으니 편협하게만 보인다”며 “비정규직 같은 다른 계급의 이익과 소통하고 절충하는 제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덕적 이분법 ‘동지 아니면 적’
비정부기구(NGO)도 거대담론이나 운동 지향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윤순철 경실련 시민감시국장은 “시민단체들이 거대담론이나 이명박·한나라당·민주당의 정치문제에 매몰됐다”며 “시민과의 불통현상은 본연의 사명인 생활 문제에 천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시국에서 정치 참여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슈에 따라 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와 호흡을 맞추면 된다”며 “우리 동네 모텔 건설을 막는 일에서부터 미 쇠고기 문제 등 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다양한 생활 문제들을 파고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NGO가 운동 방향이나 정책을 정하는 방식도 소통의 걸림돌이다. 상근자가 정책 입안을 주도하고, 자원봉사자 위주로 운동이 조직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경우 시민들의 관심과 거리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시민없는 시민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상의하달식도 문제다. 우문숙 대외협력국장은 “민주노총도 80만 조합원의 사업과 투쟁이 아니라 총연맹이 기획한 사업이 현장과의 소통이나 토론 없이 지침 형식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사업이 왜소화되고 형식화된다”고 했다. 그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가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대중을 대상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짚었다.
운동권 습속을 떨쳐내지 못한 언어와 집회 방식 등 ‘스타일’ 문제도 불통의 한 요소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 축제가 어우러진 시민들의 저항은 기존 운동 단체들로 하여금 ‘대중과 호흡하는 소통’의 문제를 되돌아보게끔 했다. 이인자씨(36)는 “언어나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 박정희·전두환 때의 방식은 버리고 좀 세련된 방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모씨(33)는 “진보 시민·사회단체의 문제는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시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고, 여전히 가르치려고만 든다”고 말했다.
도덕성 위주의 경직된 시각이나 내편 네편으로 나누는 이분법도 걸림돌이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진보에서 도덕은 굉장히 중요한 필수 가치이지만 너무 도덕적으로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과도하면 사회적 통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선과 악으로 딱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옳아도 타협이 없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안 풀리기도 한다.” 이분법 문제는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나온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전 협의도 없이 무슨 무슨 연대에 일단 이름을 넣고 본다”며 “뒤늦게 알고 거기서 빠지려고 하면 서운해하거나 때로는 왕따를 시키는 분위기도 있다”고 했다. 김명신 ‘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공동회장은 “당신이 내편에 올인하면 우리는 더 세력을 키울 수 있는데, 올인해 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말을 듣는다”며 “‘동지 아니면 적’이라는 게 강해 중간에서 소통하기 힘들 때가 있다”고 전했다.
언론 구미에 맞는 이슈 편중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의 불통 문제를 이들에게 전가할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우선 정부가 문제라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지금 MB 정권은 ‘정권 비판 안 하면 정부 사업 줄게’ 하는 식으로 국민 세금을 갖고 시민·사회단체를 줄세우고 있다”며 “중립 지대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의 재정난과 언론 문제도 나온다. 윤순철 국장은 “언론이 시민단체 통상의 활동, 생활 문제 이슈를 잘 다루어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언론의 구미에 맞는 이슈에 맞춰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재정적 자립성이 취약하다보니 10~20년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장기적 계획을 갖지 못한 채 다급하게 그 단체의 존립 목적을 보여주는 사업 쪽에 집중하게 된다”며 “시민과의 직접 대면 소통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정 문제 때문에 단기적 성과를 내는 사업에 집중하므로 언론을 향한 운동이 된다”며 “하지만 제도언론이 보수적이다보니 이들 단체와 대중이 간접적으로 소통하는 통로가 협소하고 척박하다”고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으로 시민·사회단체의 불통 문제를 진단했다. 김 교수는 “노동단체는 (조합원의) 이익의 문제, 생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타협과 양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고집스러운 이미지로 비칠 수 있다”고 했다. “시민단체는 천성산 터널 문제나 용산 참사 등 세계관, 가치관이 충돌하는 양자택일의 이슈에 개입할 때가 많은데, 이런 이슈에서 원칙을 지키다보면 불통하고 타협에 미숙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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