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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여성작가 여섯 사람이 섹스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단편소설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문학사상)를 읽어보았습니다. 빨간색 표지가 무척 자극적이었지만 내용은 “아주 은밀한 섹스판타지”라는 도발적인 광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욕망과 한계를 인정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선을 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돈, 섹스,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요?

자신이 욕망 덩어리라는 것을 인정했다가는 하루아침에 매도되기 쉬운 세상에서 검사 출신의 법학자 김두식은 욕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결심의 결과물로 <욕망해도 괜찮아>(창비)를 내놓았습니다.

김두식은 <헌법의 풍경>(교양인)에서 직접 체험한 법조계의 어두운 현실을 용기 있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헌법 정신의 수호자여야 할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기득권층과 결합해 ‘불멸의 신성가족’을 만들고는 법과 시민 위에 군림하는 모습을 통렬하게 고발해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안겨주었지요.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김두식은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의 교감 이상으로 ‘살(몸)’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소설가들이 자기 욕망을 정직하게 털어놓기 위해 소설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하고서도 자신의 ‘색(욕망)’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말입니다.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끝없이 통제하는 문화 속에서 평생을 보낸” 김두식은 우리 사회의 경계선을 넓히는 도구로 자신의 삶을 이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자신의 억눌린 욕망과 분노를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험한 정글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지요.

 

섹스 테마 소설집 <이브들의 아찔한 수다>를 펴낸 여성작가들 l 출처:경향DB

김두식은 지금은 중산층의 터전’으로 변한 성북동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교사였던 김두식은 “중산층동네와 산동네의 접경지역”에서 살았지만 “삼중당 문고를 품고 살다시피한 똑똑한 문학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중학생 시절에 부자동네 아이들의 화사한 세계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부자 동네 출신 아이들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한 ‘재벌 3세’에서부터 그럭저럭 괜찮은 중소기업의 아들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았습니다. 중산층동네 친구들은 판사, 벤처회사 연구 책임자, 성악가, 헌법연구관 등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자만 셋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부자 동네 아이들이 가업으로 이어받은 회사에서 부장이나 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두식은 “부자동네 아이들이 앉아 있는 사장실에 결재받으러 드나드는 걸 피하려는 무의식이 우리를 사법시험 합격으로 이끈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산동네 출신 친구 중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공부를 잘해서 최고로 꼽히는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졸업과 동시에 무조건 돈을 벌어야 했던 그 친구에게는 미래를 위해 투자할 돈과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산동네 출신 친구들은 근본적인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김두식은 성급한 일반화를 우려하면서도, 친구 부모님들의 소득수준에 따른 순위가 그 자녀인 자신 세대에서도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평준화와 과외금지 조치로 그나마 활발한 신분변화가 일어났다는 학력고사 세대”인 자신 세대의 ‘계층 고착화’가 이렇게 굳어져 있는데 이후 세대는 어떨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지금은 로스쿨의 등장으로 “성적 하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무식한 제도(사법시험)가 가졌던 투명함”마저 사라졌습니다. 고등학교도 철저하게 서열화되었습니다. 이제 서열화는 점점 내려가 머지않아 태어나는 순간부터 서열이 정해질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런 서열이 싫어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요. 저는 김두식의 고백을 통해 검찰이 “권력의 화장지 노릇”이나 하는 원인을 유추해볼 수 있었습니다.

73세의 소설가 김주영은 <잘 가요 엄마>(문학동네)에서 새아버지의 등장으로 인한 좌절감과 수치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황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야 어머니라는 존재의 실체를 정확하게 깨닫고 “어머니에 대한 참회록”을 털어놓을 수 있었답니다. 한때 원망을 넘어 저주까지 했던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한 이 소설의 솔직한 고백은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김려령의 장편소설 <가시고백>(비룡소)에서 18세의 주인공인 천재 도둑 민해일은 친구 허지란의 새아빠 전자수첩과 친아빠 넷북을 연이어 훔칩니다. 해일은 자신이 훔친 사실을 지란에게 고백함으로써 드디어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아프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떨치고 제 심장의 가시고백을 뽑아내야만 그때서야 믿어주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연대가 이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너무 늦어 곪아터지기 전에 저마다의 ‘가시고백’을 뽑아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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