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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요즘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입니다. 한 온라인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니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은교>(박범신, 문학동네), <헝거게임>(수잔 콜린스, 북폴리오), <화차>(미야베 미유키, 문학동네) 등 영화화된 원작소설 몇 편만이 순위에 들어 있네요. 성석제의 신작 장편소설 <위풍당당>(문학동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의외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소설이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꾸준히 ‘팔리는’ 몇몇 대형작가가 존재했지만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발 재정위기로 이어져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위기’를 끼고 살아야만 할 것 같은 2010년대에는 대형작가들의 작품마저 ‘임팩트’가 강하지 않으면 곧바로 외면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4년째 출판전문지의 발행인으로 있는 저는 소설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특집이라도 꾸려보라는 주변의 압력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꽤나 읽는(아니 읽어야만 목숨을 부지하는) 출판평론가들에게 소설의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가가 누군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 인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설을 살릴 수 있는 묘안을 찾아보자는 취지였지요.

 

대형서점에 진열된 베스트셀러 책들 I 출처:경향DB

그렇게 추천받은 작가가 천명관과 이응준입니다. 천명관은 <고래> <고령화 가족>(이상 문학동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전 2권, 예담) 등 ‘영화 소설 3부작’으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고래>는 훗날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불리게 되는 주인공인 벽돌공 춘희와 고향 산골마을에서 가출해 어촌에서 늙은 생선장수와 살림을 차린 후 키가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 걱정과 악명 높은 건달 칼자국 등을 거치며 굴곡진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어머니인 여걸 금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령화 가족>의 화자인 나(이인모)는 영화감독을 하다가 영화가 망하는 바람에 마흔 여덟의 나이에 ‘더 이상 팔 것이 없어’ 일흔이 넘은 엄마의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집에는 120㎏의 거구에다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인 52세의 형 오한모(오함마)가 이미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곧이어 화려한 이혼 경력의 소유자이면서도 또다시 남편과 이혼할 예정인 45세의 여동생 미연이 딸과 함께 합류합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주인공인 삼촌은 자기 삶의 롤모델인 이소룡을 닮고자 했으나 결국은 액션신 단역배우인 ‘다찌마리’의 인생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삼촌은 풍만한 가슴으로 값싼 포르노 영화와 액션 영화를 전전하는 삼류 배우 정원정을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헌신도 불사하는 지극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천명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개성이 무척 강합니다. 그들은 보편적 일상 이상을 꿈꾸거나, 일상 이하에서 고통 받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짝퉁 인생’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지질한 인생들입니다. 천명관은 이들의 삶을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대단한 입담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응준은 스스로 소설미학과 관념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문학적 성리학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은 진즉 인정받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실존적 위협을 느끼자 상업영화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영화판을 경험한 이후에 자신을 부수는 용기를 갖고 쓴 것 같은 소설이 <국가의 사생활>과 <내 연애의 모든 것>(이상 민음사)입니다.

<국가의 사생활>은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 통일한 지 5년 뒤인 2016년 한반도를 무대로 어느 전대미문의 인민군 출신 폭력 조직의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스릴러입니다. 청천벽력같이 찾아든 평화통일의 대혼란 속에서 공화국 군대의 무기 회수와 관리가 허술한 탓에 대한민국에는 어둠의 세력이 마구 활개를 칩니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나이 마흔 줄의 미녀 노처녀이자 진보노동당 대표 오소영 의원과 역시 마흔의 미남 노총각으로 판사 출신이자 보수여당인 새한국당의 김수영 의원이 주인공인, 정치권의 좌우대립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적 이해를 통해 도달한 사랑의 힘이 사람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가를 해학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강한 인물들의 삶이 마치 영화 스크립트가 빠르게 넘겨지듯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되는 이 소설들은 곧바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영화적 과장이 자주 등장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소설적 진화를 이룬 듯합니다. 이렇게 전통적 소설 기법의 틀을 과감히 깨버린 이들 소설은 이야기가 갖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지금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는 정치적 공방, 종교와 음모론, 내부고발, 성공담과 실패담 등 무수한 이야기가 범람합니다.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대단한 대중은 이제 그런 이야기에 곧바로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보냅니다. 지난 4·11 총선 국면에서도 불법사찰, 막말, 표절, 성추행 등의 개인과 일상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판세가 크게 요동쳤습니다.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으로 국가의 미래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지요. 이런 세상이니 우리는 천명관과 이응준 같은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에 어떤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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