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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명목으로 독일을 쏘다니는 중이다. 독일에서 여행자로서 곧바로 운전하며 다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 운전하던 대로 했더니 졸지에 ‘난폭자’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 움직일 기미만 있으면 차들은 멈춰섰고, 자전거가 옆에 지나가면 차들은 속도를 줄였다. 깜빡이를 켜면 옆 차로의 차는 속도를 줄이면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아우토반에서도 거친 운전자들은 차량이 가진 최고의 역량을 다 해 속도를 냈지만, 위험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속도가 아찔한 운전자들은 자연스럽게 우측 차로로 빠른 차들을 피했고 그때 역시 우측 차로의 차들이 충분한 안전거리를 만들어 줬다. 그들은 ‘안전거리’ 확보를 하나의 규칙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도로를 약간이라도 침범하거나 보행하려는 사람들보다 먼저 가려고 할 때 독일 사람들은 한결같이 항의했다. 독일어는 몰라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차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딱 제자리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항의한다는 점이었다. 슈투트가르트 시내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 중, 카운터의 직원은 한국의 알파벳 철자를 찾지 못해 헤맸다. 성격 급한 나는 “도와드릴까요”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카운터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 직원은 곧바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아, 제발 제자리를 지켜주세요”하고 제지했다. 내 무례함을 곧바로 인지했다. 그건 바로 ‘거리’였다.

한두 달 전쯤 미군이 운영하는 영어회화 클럽에 간 적이 있다. 미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거리’가 주제가 됐다. 20대 초반의 미군 남성은 한국인들이 아무 때나 ‘치고 들어오는’ 혹은 ‘들이대는’ 것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밝히기 꺼리는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물어본다는 거였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대해서 신랄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던 영국사람들이 기억났다.

한국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숫자를 채웠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에 자란 젊은 세대는 대개 개인주의자로 자랐다. 그러나 상사, 고객사, 주인 등 ‘갑’들에게 무력한 ‘을’들은 ‘거리’를 두고 싶지만 살기 위해 ‘눈치’를 보고 ‘무난한’ 모습을 연출한다. ‘무난한’ 모습은 모두의 탈진에 의존한다. 게다가 ‘탈락’의 공포를 완충해줄 정도로 사회적 보호망은 없다. 그러니 ‘개인적 공간’은커녕 ‘감정’마저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이 헛헛한 마음으로 ‘혼밥’을 하고 그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 관계적 고립이 지속되면 사람이 상한다. 반드시 고립된 개인들을 함께하게 할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독일에서 부러운 것은 ‘개인적 공간’을 잘 지켜주는 것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이를 사회적 ‘연대’로 잘 가꿀 수 있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란 책에 따르면 독일의 노동조합과 직장협의회가 경영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적 공간을 지킬 수 있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보장하고 어떤 형태로 일해도 생활에 위협을 느끼지 않기에 뜻이 맞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누릴 시간 여유가 있고,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평일 중에도 노동조합이 확보하기에 ‘연대’의 가치가 더욱더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항의하는 것도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하게끔 제도적 보호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연대가 그나마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이방인도 편안하고 소수자도 편안하다.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탈진하는 사람이 넘치는 지금, 그런 장치들은 더 빠르게 효과적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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