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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5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다. 여러모로 이 대선이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겼지만 그중에 하나가 민주당이 내건 구호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당시 이 구호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먹고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리는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컨설턴트 런츠의 말을 빌리자면, 이 구호는 우리 선거사 최고의 ‘먹히는 말’(words that work)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행그리(hangry)란 단어가 등록됐다. 행그리는 배고픈(hungry)과 화난(angry)이 합쳐져 ‘배가 고파 화가 난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다. 먹고살기 힘들고, 강자·승자독식에 짓눌리고, 정치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서민, 보통사람들이 바로 행그리 피플(hangry people)이다. 여기서 피플은 우리 헌법에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 규정된 국민이다. 그 국민이 먹고사는 게 힘들어 외치고 있다. 나도 좀 살자!

잘못된 현실을 바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진보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게 진보다. 우연히 어떤 부모를 만났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지 않고, 각자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도록 하자는 게 진보다. 진보는 어떻게 이 꿈을 실현했는가? 정치를 통해서다.

우리가 열망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도 진보세력의 정치적 기획이었다. 복지국가의 성패는 복지 ‘정책’(policy)이 아니라 복지 ‘정치’(politics)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진보는 정치적으로 유능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다.


새정치민주연합 유성엽,황주홍,문병호 의원이 탈당 선언 뒤 인사하고 있다._경향DB


대한민국의 진보는 무능하거나, 최소한 유능하지는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선거에서 늘 진다. 다수의 표를 얻는 쪽이 승리하는 게 민주정치다. 다수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공심위상, 공성위하(攻心爲上 攻城爲下)라는 말이 있다. 사람을 공략해야지 성을 공략하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상대의 잘못만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은 ‘공성’의 전략이다. 대안을 가지고 설득하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 ‘공심’의 전략이다. 공성 전략으로 일관한 결과, 식상한 희망과 익숙한 패배였다.

둘째, 엉뚱한 곳에서 헤맨다. 서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지 못한다. 우리 국민을 힘들고 슬프게 하는 것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먹고사는 게 가장 우선이다. 진보가 여기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않으니 유권자가 표로서 호응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보수가 워낙 민생을 입에 달고 사니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민생은 원래 진보의 아젠다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 특혜가 아니라 형평, 반칙이 아니라 공정을 지향하는 것도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함이다.

보수의 민생과 진보의 민생은 다르다. 보수의 민생이 가진 것을 일부 양보하는 것이라면 진보의 민생은 당연한 권리다. 진보가 추구하는 복지(welfare)를 보수가 굳이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차이다. 보수는 더 많은 것을 내놓더라도 약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 한다. 상황이 좋아지면 양보를 거둬들일 속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보는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권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힘이 있어야 자신의 몫을 찾고,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지국가를 말할 때에는 복지국가를 지탱하는 정치 시스템, 사회적 역학관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서민의 삶이 힘드니 그들에게 좀 더 주자는 게 복지의 본령이 아니다.

유능한 진보라면 행그리 피플에게 호소하고, 그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각종 데이터를 보면 국민들이 화를 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앵그리’의 이유를 충분히 살피지 않고 관성대로 정치·도덕적 이슈에 매달리면 안 된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헝그리’에 있다. 왜 보수정부 8년, 박근혜 정부 3년 동안 보통사람의 삶이 피폐해졌는지를 쟁점으로 삼아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지금 진보가 주목해야 할 국민은 모럴(moral) 피플, 리버럴(liberal) 피플이 아니라 행그리 피플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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