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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4) 금융위기에 접속된 나…투자자와 비투자자
김재중·유희진기자



고수익의 유혹은 달콤했다. 은행 직원들은 상냥했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들은 “요즘 펀드 하나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바보”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은 까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기저축과 다름없다던 그들의 말을 믿고 묻어뒀던 목돈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피 같은 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엔 두세배로 커져버린 삶의 무게가 자리잡았다.




■ 부부 생이별한 오원금씨(가명·56)

오씨는 지난 9월2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아내를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아내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처제의 갈비집에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몇년째 좌골신경통과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도 2시간 뒤 이란 건설현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0년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 방파제 토목공사를 시작으로 28년 동안 중동과 아프리카 건설현장을 들락거렸던 오씨지만 이처럼 중동행 비행기를 다시 타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오씨는 2005년 12월 퇴직금으로 생각하고 모아뒀던 1억원을 들고 우리은행을 찾아갔다. 우리은행이 ‘우리파워인컴’ 펀드를 대대적으로 광고할 때였다. 그는 5000만원씩 쪼개 자신과 아내 명의로 우리파워인컴에 가입했다. 한달 뒤 나온 통장에는 ‘펀드’ ‘파생상품’ 같은 단어가 찍혀 있었다. 평생 주식이나 펀드투자를 해본 적이 없던 오씨가 이 단어의 뜻을 묻자 은행 직원은 “그냥 상품 명칭일 뿐이고 3개월마다 고정이자가 지급되며, 무디스가 평가한 신용등급 AAA 채권에 투자하므로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단다. 이 직원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절대 안전한 정기예금과 같은 상품”이라고 장담했다. 그 뒤로 3개월마다 원금의 6.4%에 해당하는 돈이 ‘예금이자’라며 통장에 찍혀 나왔다. 당시 시중은행 정기저축 예금 이자보다 1%포인트가량 높은 수준이었다.

대학을 나오고도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는 아들(30)과 딸(25)이 걱정이긴 했지만 오씨에겐 은행에서 차곡차곡 몸을 불려가고 있는 1억원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 돈은 오씨 부부의 노후자금이자 자녀들의 결혼자금이기도 했다.

지난 8월말 은행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은행 부지점장은 오씨 부부가 묻어뒀던 원금의 평가액이 마이너스 81%로 깎였다고 했다. 1억원이 2년9개월 만에 1900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는 얘기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놀란 오씨가 은행으로 달려갔지만 황당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예금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만 믿고 투자했던 돈이 고위험 파생상품에 투자됐던 것이다. 3개월마다 통장에 찍혔던 예금이자는 원금을 조금씩 쪼개 지급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은행에 돈을 맡길 당시엔 펀드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고, 파생상품이란 말은 더더욱 몰랐어요. 그런데 은행은 가입 때도 우리를 속였고, 손실도 제때 알리지 않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기회조차 빼앗았어요.”

■ 콩나물값 깎아 모은 돈이 허공으로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40대 주부 김은희씨(가명)는 요즘 남편과 자식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김씨는 지난해 10월 은행에서 펀드에 들었다. 아파트를 사면서 대출받아 남은 돈 3000만원과 그간 푼푼이 모아뒀던 여윳돈 2200만원이었다. 은행에 갈 때마다 직원은 “아이고 사모님 이 돈을 왜 그냥 묵혀두나요”라며 투자를 권유했다. 깨알같은 글씨가 적힌 상품설명서를 받기는 했지만 그냥 일반적인 펀드인 줄로만 알았다.

지난 10월 3000만원짜리 펀드를 강제 환매당했다. 김씨의 손엔 300만원이 쥐여졌다. 김씨가 가입한 펀드는 1년 만기 선물환 옵션이 걸려 있었지만 김씨는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김씨가 환손실분을 추가로 내지 않자 은행 측이 강제로 환매하고 상품 계약을 종결시켜 버렸다. 그나마 2200만원짜리 펀드는 200만원만 깎였다. 펀드 가입을 권했던 은행직원은 이미 다른 지점으로 옮겨 자취를 감췄다.

여름부터 장사가 안돼 수입이 거의 없는 김씨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냥 은행에 예금으로 넣어둔 줄로만 안다. 매달 주택담보대출 이자로만 150만원씩 나가고 있고, 재수생인 아들의 학원비로도 100만원씩 나가고 있다. 당장 생계비가 걱정이다. 김씨의 하소연을 들은 친정 언니가 자기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작년에 아파트를 사면서 이미 3억원을 대출 받은 터라 돈을 또 빌리기가 겁이 난다.

김씨는 “대형마트에 가면 100~200원씩 깎아주는 쿠폰을 잔뜩 들고 갈 때 눈물이 왈칵 났다”면서 “애들 결혼자금, 우리 부부 노후자금이었는데 남편에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가끔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픈 충동이 생긴다”며 울먹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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