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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 때의 일로 기억난다. 녹색당 만든다고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방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녹색당의 주축 중의 하나가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농업경제학의 원로들이 차라리 농민당을 먼저 만드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주었었다.
스위스의 남쪽 이탈리아권은 농업지역이라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편인데, 여기에서 티시네티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당이 실제로 생긴 적이 있었다. 나중에 엔지니어 등이 주축이 된 도시 전문가들과 합쳐지면서 극우파 정당이 되었다. 레닌에서 모택동 시절에는 농민들이 진보 세력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정치적으로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극우파 정당이라도 농민당이 있거나 정파로서 존재하는 편이 농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농정을 하는 곳 중의 하나인 스위스가 농업 재정을 국민투표까지 끌고 간 데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 표로 움직이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어디 신경이나 쓰겠는가?

영남의 한나라당 텃밭, 호남의 민주당 텃밭 이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겠나 싶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 정치인들이 농업을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시늉만 낸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수 년 사이에 농업이 한국 정치의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와 있다. 출범 초기의 광우병 사태의 핵심에 농업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경향신문DB


학교급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여기에는 식품안전을 둘러싼 시민운동의 흐름과 유기농업 등 농업운동의 흐름이 결합되면서 진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학교 급식, 작업장 급식, 군대 급식 그렇게 세 개의 목표를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학교 급식 쪽의 속도가 빨라졌지만 원래는 농업운동 역시 중요한 한 축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명운을 걸고 주민투표 한판이 벌어졌는데, 농업이 그 핵심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잠시 망각된 것 같다. 친환경+무상급식, 그 용어 자체가 사회운동의 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노무현 정권 때의 농업정책은 6㏊(헥타르) 정책으로 불리는 대농으로의 전환 그리고 농촌 개발로 상징되는 지역개발 정책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별로 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MB 정부와 함께, 그나마 그게 어디냐,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게 어디 농업뿐이겠냐? 주요 국회의원과 공기업 간부들이 가짜로 농민 등록하고 쌀 직불금 타먹은 게 정권 초기에 터진 스캔들인데, 이제는 그 직불금마저 없애려고 난리이다.

한·미 FTA 등 개방 정책으로 피해받는 부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한나라당 농촌지역 국회의원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은데, 잠시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잊은 사이, 농민들에게 가는 예산부터 줄이겠다는 게 최근 집권 여당, 한나라당님들과 경제 고위공무원님들이 하시는 일이다. 4대강 추진하느라고 한편으로는 직불금마저 예산에서 빼겠다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농업 정책은 여전히 별 거 없다. 경제관료는 8% 정도 되는 농민의 수를 3~4%로 줄이는 게 선진국이 되는 농업정책이라고 믿는 것 같다. 물론 그 정도 비율이 선진국에서 나오는 건 맞는데, 지금처럼 하면 장기적으로는 2%도 지키기가 어렵다. 새로 농업에 들어가는 청년들의 숫자가 거의 없는데, 지금의 고령농민들이 농업에서 물러나면 이제 농사는 누가 지을 건가? 그때 되면, 알아서 남는 농지를 아파트로 바꾸겠다는 게 경제관료들이 생각하는 장기적 농업에 대한 위상이다.
무상급식은 어떻게 보면 지역 농민 특히 친환경 농민들에게 가는 보조금의 의미가 강하다. 수요에서 지원이 되면, 공급 쪽이 안정되는 보조금 효과가 있는 게 뻔한 거 아니냐? 직불제와 비축미 등 농업관련 예산부터 먼저 자르겠다는 한나라당은 사실 농업에서는 역적 정당과도 같다.

다음 정권에서 걸어야 할 농업 공약을 딱 한 가지만 고르자고 하면, 식량자급률 특히 쌀을 제외한 농산물에 대한 부문별 자급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게 없으니 국내 농업은 만날 홀대받다가 가격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바로 수입해서 농민들 피눈물 나게 하는, ‘휴대폰 팔아 쌀 사먹는다’의 연속이 되는 것 아닌가?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청년 농민 혹은 청년 귀농인에게 생활 지원 수당이 있었으면 한다. 물론 형태는 다양할 수 있는데, 이런 소득지원은 WTO 체계에서도 허용되는 정책이다. 농사는 누가 지을 건데, 이 질문에 다음 정권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농업은 기본적으로는 식량 정책이지만 동시에 고용 정책이기도 하다. 토건보다는 농업이 더 현실적인 경제 정책이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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