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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 능력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것은 1987년 대선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양 김의 분열로 결국 노태우에게 정권이 갔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진짜 보수의 기획통들은 좀 다르게 설명한다.

“당신들이 진 것은, 수권 능력이라는 단어에 잘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어쩌면 이 말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최초의 실용 언어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 시절의 YS와 DJ에게는 수권 능력이 있었을까? YS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고, DJ는? 노무현 시대까지, 조·중·동 프레임에 따라다녔던 ‘아마추어리즘’ 같은 것의 대중적 인식의 기원이 바로 이 말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말하는 ‘명품정당’의 이미지에도 이런 수권 능력의 이미지가 강하다.  

지금은 당시의 민주화 세력에 붙던 이 질문이 진보신당에 붙어 있다. 당신들은 수권 능력이 있는가? 내가 가끔 보수적 인사들하고 노회찬이나 심상정에 대한 얘기를 하면,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오래된 프레임이지만, 한 번 프레임이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생겨난 가장 큰 성과는 국정의 방향은 몰라도 수권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더 잘한다는 것을 보여준 게 별로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시민단체에 해보자. 시민단체가 정부 부처를 운영한다고 하면 적어도 한나라당보다 잘할 수 있는 곳이 어느 정도 될까? 시민단체의 역사가 이제 10년을 넘어가고보니, 국정원장이나 경찰청장 같은 공안부서 아니라면 당장 장관을 해도 좋을 인사들을 만들어냈고, 장관실 정도는 언제든지 구성할 수 있는 실무진과 연구진도 갖추고 있다.

시민 진영이 증명한 것은, 정책 대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론적 엄밀성을 갖춘 분석능력은 한국의 시민단체가 아직은 좀 떨어지지만, 정책 제시 능력은 한국의 어느 집단보다도 강력하다. 정부가 운용하는 국책연구소와 비교해 보면, 여전히 분야별 분석 깊이는 좀 낮지만, 종합 능력은 더 뛰어난 경우가 많다.

다음 대선은 진보와 보수의 49 대 51 싸움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당으로 보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정치공학에 푹 빠져 있고, 길게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정책 연구능력으로 보면, 여의도연구소나 민주정책연구소나, 차마 자기네 보고서를 자신있게 공개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보수 쪽에는 기업연구소들이 은근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간 시민단체나 민중단체에서도 싱크탱크 등 연구능력이 많이 확충되어서 지난 대선 때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 수행능력에서, 진보 쪽 시민단체와 뉴라이트 쪽 시민단체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집권 후 보수단체들은 교과서 고치고 북쪽에 풍선 날리는, 지나칠 정도로 이념적인 일에만 골몰했지, 자신들이 그렇게 예전에 목 놓아 외치던 ‘정책 대안 제시’나 분석능력을 보여준 게 거의 없다. 이제는 오히려 저들이 수권 능력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역전되는 순간이 온 것 아닌가? 최소한 정책능력이나 국정능력으로만 보면, 진보 쪽 시민단체가 밀릴 게 없을뿐더러, 훨씬 높은 수준에 와 있는 것 아닌가?

반MB 진영에 단일세력으로 집권할 최대 분파도 없고, 독자적으로 국정운영할 수 있는 그룹도 없다. 지금 이 집단이 가진 가장 취약점은, 집권 때까지만 힘을 모으고, 그 후에도 힘을 모을 수 있다는 보장도, 그걸 주도할 원로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힘이 잘 모이지 않는 것이다. 그걸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집단지도체제를 전제로 한 연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다음 정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보여주어야 한다. 시민단체가 특히 잘할 수 있는 환경부 같은 부처가 몇 개가 있고, 새로운 정권에서는 시민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해서 정권 자체를 성공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특정 정치인에 줄 선 대로 장관이나 정부기관 나누어주고, 보은하는 방식으로 다음 정권을 운영하면 백전백패이다. 관료에게 먹힌 경험, 조·중·동의 여론 공세에 밀린 역사, 이런 걸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시민진영의 축적된 수권 능력을 더 활용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추가 옵션이 아닌가? 민주당 힘만으로는 집권도 어렵지만, 통치도 어렵다.
어용단체일 것이냐, 책임을 지는 집권세력일 것이냐 그 애매한 구분선에 대한 논의를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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