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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안도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일부에게는 악몽이 시작되는 날이었을 것이고. 나는 오랫동안 같이 활동했던 시민단체의 동료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넓게 보면, 한국에서는 두 개의 대안 세력이 아주 좁은 방에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다. 총선연대 등 각종 연대회의 등을 통해서 많은 인재들이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대던 시절이 한 번.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하기 직전과 직후, 한국의 인재들이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로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다.

노회찬, 심상정은 물론이고,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목수정 같은 사람들이 다 이 때 좁은 방에서 복닥복닥거렸다. 두 그룹 모두 이후에 풍비박산, 흩어지기 직전이었지만 그 때의 시민단체 인재들은 박원순과 함께 활로를 찾게 되었다. 진보정당 운동에 있던 그 아까운 사람들의 활로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김어준 (경향신문DB)


어쨌든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진짜 일단 대중들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만나는데 처음 성공한 집단이 바로 ‘나는 꼼수다’(이하나꼼수)이다. 왜 하늘은 한나라당을 낳고 또 김어준을 낳았는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꼼수가 없었다면, 어눌하면서도 TV 토론에서 ‘따박따박’ 나경원을 ‘발라주지’ 못하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중년의 남성이 시장이 될 수 없었을 건 분명하다.
최근 김어준을 자주 만났고, 그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시간들이 늘어났다. 좌파 쪽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해준 얘기는, “왜 김어준 따위와 노느냐?”였고, “옛날 그 김어준이 아니다”가 나의 답변이다. 명실상부, 공중파와 언론을 통틀어서 지금 김어준은 최고의 기획자이다. 지금 한국에 김어준의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없고, 그만큼 종합적이며 기민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시민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어준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김어준은 무엇을 만들었는가? 바로 시대의 스타일 혹은 스타일의 시대를 만들었다. 한때 조선일보가 그런 스타일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조선일보 사장이 한국의 밤의 대통령이었다. 지금 10대와 20대 붙잡고 조선일보 사장이 누구인지 한 번 물어보시라, 대부분 모를 것이다. 조선일보의 시대는 끝났다.

진중권이 스타일을 만든 시절이 있었는데, ‘디워’ 논쟁 등 많은 논쟁에서 진중권은 한국의 신문들을 진보누리 게시판처럼 만들어버렸다. 촛불집회와 함께 진중권 스타일의 시대가 열렸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지금은 김어준의 시대이고, 그가 ‘웃기는 사람들’의 시대를 열었다. 김어준이 내용이 있거나, 없거나, 그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시대의 스타일리스트이며, 그게 바로 김어준의 힘이다.

민주당은 정봉주 덕분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스타일 못 따라가는 건 마찬가지이다. 한나라당의 50~60대 할아버지들이 절대로 못 따라가는 게, 바로 이 스타일 전쟁이다. 자연인 김어준은 잡아갈 수 있고, ‘나꼼수’ 방송은 세우거나 재갈을 물릴 수 있겠지만, 스타일을 잡아가둘 수는 없다. 그래서 김어준이 무서운 것이다. 순교자를 만들면, 더 유명해지고, 더 강해진다.

조선일보의 스타일이 프레임 싸움이라면 김어준의 나꼼수는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이다. 프레임과 스타일, 이 싸움에서는 무조건 스타일이 이긴다. 예전에는 신문과 방송이 프레임을 짜면 그걸로 세상이 움직였는데, 이걸 다 틀어막아 놓으니까 결국 새로운 스타일이 나온 것이다. 내가 MB라면 그에게 공중파 방송을 맡기고 그걸로 회유하고 순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길을 꽁꽁 막아놓으니, 형식 실험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세계 유일무이의 스타일 혁신이 생겨난 것!
나경원, 박근혜. 이들은 뒤에서 누군가가 코치하지 않으면 한마디도 못하고, 수첩 없으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도 프레임은 알지만, 스타일은 모른다. 김어준은 마이크만 주면 밤새 떠들 사람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나경원 후보에게 유권자들의 건의사항을 적어둔 수첩을 건네고 있다. (경향신문DB)


김어준의 스타일은 최소한 고등학생이면 공감할 수 있다, 이게 진짜 무섭다. 프레임만 짜고 언로만 잡으면 된다고 했던 청와대의 ‘얼리버드’들, 미안하게도 그 시대는 끝나간다. 한나라당, 살고 싶으면 넥타이부터 풀고, 수첩부터 버려라. 박근혜가 나경원에게 수첩을 넘겨주는 순간, 난 이 선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수첩은 프레임 시대를 상징하는 오래된 상징이고, 이제 우리가 살아갈 시대에 수첩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 저 촌스러운 아저씨가 왜 좋아, 싶겠지만, 고등학생들이 그 스타일에 열광하는 순간, 이미 게임 오버다.
싫어도 이게 바로 대중이, 시민이 원하는 것이다. 김어준 입에서 “한나라당, 저 정도면 좀 바뀐 것 같다”, 그런 순간이 와야 한나라당이 자민련처럼 사라지는 걸 피할 수 있다. 많이 바꿔야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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