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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ㆍ5부 -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3) 지역연합을 구축하라

지난 8월29일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서 열린 남미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회원국 정상들. 정상들은 외국 영토에 대해 위협하거나 무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바릴로체(아르헨티나) | 연합뉴스




라틴아메리카도 유럽처럼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을까? 중남미 연합 시민이라는 신분증,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중남미 의회, 빈국과 경제위기 국가를 지원하는 중남미 은행,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중남미 안보기구 등을 갖게 될까?


중남미 국가들이 최근 10년처럼 자주 만난 적은 없다. 이 대륙 국가들은 자국 문제는 물론 인접국과의 갈등조차 늘 미국, 유럽 국가들과 만나서 풀려고 했다. 이웃 나라들과 머리를 맞대려 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난 10년간 중남미 정상들의 만남엔 늘 ‘미증유’ ‘전대미문’ ‘사상 초유’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은 2008년 12월 초의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정상회의였다. 브라질 정부의 초청으로 중남미 33개국 정상들이 모두 모여 이틀간의 토론 끝에 2010년에 독자적인 기구를 창설하자고 합의했다. 폐막 연설에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드디어 중남미 국가들이 힘을 모았다. 이제 그 누구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200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가 제2의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이 정상회의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참가국 리스트였다. 회의를 소집한 브라질 정부는 중남미 33개국 정상에게 일일이 초청장을 보냈다. 중미와 카리브해의 소국 정상들을 공수하기 위해 브라질 공군 소속 비행기까지 보냈다. 특히 1962년 이래 국제무대에서 사실상 추방된 쿠바를 부르기 위해 룰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33개국 참여 2010년 독자기구 창설 합의
친미 콜롬비아에서 공산주의 쿠바까지 하나로

하지만 이 대륙 일이라면 오지랖 넓게 간섭해온 미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옛 식민지 종주국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초청되지 않았다. 회의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친미 우파 콜롬비아에서 공산주의 쿠바까지 모두 참가하는 중남미 통합기구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의는 중남미가 주도적으로 냉전시대를 종식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먼저 중남미 정상들의 결정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반세기 동안의 쿠바 적대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시인했고, “우리 모두는 동등한 파트너”라는 대중남미 외교의 새로운 원칙을 천명했다. 미국이 주도해온 미주국가기구(OAS)는 47년 전에 취해진 쿠바의 회원국 지위 박탈 결정을 철회했다.

6월 말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는 미국 정부가 즉각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고, 고강도 제재조치도 취했다.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과 한목소리로 쿠데타를 비난한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의 유일한 혈맹으로 남은 콜롬비아 우파 정부의 외교 태도도 바뀌었다. 마약조직, 좌익반군과 내전 중인 콜롬비아는 8월 중순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주변국들에 에콰도르 침공사건을 환기시켰다. 콜롬비아군과 미군은 2008년 초 게릴라 비밀기지를 공격한다며 에콰도르 영토를 침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변국의 반대 기류가 심상치 않자 콜롬비아 우리베 대통령은 사흘간 남미 7개국을 전격적으로 순방했다. 이 대륙의 한 나라가 미국과의 군사협정 문제로 이웃 나라를 순방해 양해를 구한 것도 처음이었다.


최근 1년간 미주 대륙의 변화는 지난 10년간 전개된 중남미 통합운동의 정치적 결실이다. 그 10년간 중남미 주요 11개국에서 집권에 성공한 진보 정부들은 이 대륙이 오래도록 간직해온 통합의 꿈을 되살렸다. 19세기엔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유럽과 미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다. 20세기엔 쿠바 혁명 지도자 체 게바라가 이 대륙에서 미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21세기 초에 집권한 중남미 좌파들은 두 가지 목표를 내걸고 통합운동을 전개해왔다. 중남미 대륙을 ‘신자유주의의 실험실’로 전락시킨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경제적 주권을 되찾고, ‘미국의 뒤뜰’로 변해버린 중남미의 정치적 시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통합의 대의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통합의 방향을 놓고선 두 개의 노선이 경쟁해왔다. 선수를 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였다. 2004년 말 베네수엘라와 쿠바는 미주자유무역지대에 맞서는 진보적 대안으로 미주볼리바르대안(ALBA)을 주창했다. 최근 미주볼리바르동맹(ALBA)으로 개명한 이 협정은 중남미 9개국이 참여하는 급진주의 좌파 블록으로 발전했다.

시장주의 원리와 달리 각국의 경제주권을 존중하고 빈곤 타파와 사회통합 등 사회 분야의 ‘연대 교류(Intercambio Solidario)’를 활성화하자는 것이 협정의 골자이다. 베네수엘라가 제공하는 석유에 대한 대가로 쿠바가 의료서비스로 상환하는 것이 ‘연대 교류’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사회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쿠바의 의료 및 교육 서비스가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 전파됐다. 두 나라 모두 문맹 퇴치에 성공을 거두었고, 빈민지역의 의료서비스도 크게 개선됐다. 또한 고유가 시대에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가 에너지를 우대 가격으로 제공하여 참가국들의 에너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 이 블록은 초국적기업에 대응하는 초국적 공기업 창설에도 적극 나섰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2010년부터 공동화폐 수크레(Sucre)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경제위기가 외려 미 달러화의 수요를 급증시키는 달러 지배체제의 모순에 맞서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2008년 5월에는 남아메리카 12개국이 모두 참여하는 통합기구인 남미국가연합(UNASUR)이 발족됐다. 남미 정상들이 지역 통합블록을 건설하자고 합의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 4년간 지역 통합을 위한 백가쟁명의 토론이 전개됐고,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2009년 3월엔 ‘남미판 안전보장이사회’인 남미방위이사회(Consejo de Defensa Suramericano)가 공식적으로 설치됐다. 에콰도르 침공사건 직후 룰라 대통령은 역내 분쟁을 조정하고 안보 협력을 강화할 기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는데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또한 2009년 5월에는 남미은행(Banco del Sur)에 관한 운영협정이 체결돼 실질적인 가동을 앞두고 있다. 남미은행은 2년 전 7개국의 서명으로 설립되었는데, 향후 남미 12개국 전체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계획이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노릇을 수행해온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들의 역할을 대체할 남미의 독자적 금융기관을 창설하자는 차베스 대통령의 제안이 실현됐다. 남미공동통화제도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현재까지는 공동통화의 명칭도, 발행 시점도 공식화되지 않았다.


남미국가연합 출범 과정에서 브라질은 룰라 대통령의 통합외교력에 힘입어 역내 리더의 위치를 굳혔다. 룰라 대통령은 콜롬비아, 페루 등 우파 정부들과 미주볼리바르동맹 소속 국가들 사이를 중재하면서 국내 정치에서 무르익은 통합의 리더십을 과시했다. 또한 룰라 행정부는 부시 미국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합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끌어냈다.

룰라 정부의 통합 노선이 차베스 정부의 노선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차베스가 반미 친쿠바 노선에 동의하는 좌파 국가들의 강력한 이념 동맹을 구축하는 것에 진력하는 데 비해, 룰라는 좌파는 물론 우파 정부들까지 망라하는 지역 통합블록을 구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두 노선은 대립적이라기보다 상호보완적이다. 미주볼리바르동맹은 지역 통합블록을 반대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좌파블록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중남미 통합운동은 내부에 여러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공동의 외교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중남미 국가들은 2005년 미주정상회의에서 미국이 주도해온 미주자유무역지대 구상을 좌초시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협상장에서 미국이 타국에 강요해온 농업보조금 철폐를 먼저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차베스 대통령은 집회장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는 중남미 민중에겐 사망선고”라고 역설했다.



경제적 주권·정치적 시민권 회복 노력

“이제 누구에게도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

처음으로 역내 분쟁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전례도 만들었다. 2008년 9월 남미국가연합은 볼리비아 정치 위기에 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민주선거로 선출되고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얻은 모랄레스 정부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선언하고, 쿠데타나 분리주의 시도를 비판했으며, 모든 정치·사회 세력들에게 정치적 대결과 폭력 사태를 중단시킬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남미 문제는 이제 외부의 개입이 아니라 남미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준 것이다.

중남미 통합운동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하다. 그 중에는 단기간에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경제통합 의제가 그렇다. 남미 4개국이 창설한 남미공동시장(Mercosur)의 경우 통합운동의 성장으로 참가 신청국들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역내 무역액 비중은 15%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역내 교류보다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역외 교류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한 참가국의 경제력 격차도 심각하다. 브라질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지만 파라과이는 104위의 경제빈국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소득 증대를 바탕으로 역내 교류를 꾸준히 증가시키지 않고선 경제 통합의 미래는 요원하다.

하나의 라틴아메리카로 가는 길에 숱한 장애물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유럽에서 통합의 꿈이 현실이 되는 데 반세기가량 소요됐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는 190년의 몽상이 실현 가능한 이상으로 바뀌는 데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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