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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흥 아주대 교수·정치학 그래픽 | 윤여경기자

ㆍ보수가 복지를, 진보가 성장을 말하는 ‘합의정치’를
ㆍ한국형 사회모델을 만들자

권위주의에 의존하던 한국의 국가주도형 정치경제모델은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그 동력을 상실하더니 97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난파했다.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모델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정도로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이념적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사회모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세계화로 중단된 서유럽 사회모델

시장은 사적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의 공간이자, 경쟁으로 인해 불평등이 발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시장은 경제적 이익과 자유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들, 즉 부르주아가 정치·사회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었다. 시민사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국가의 절대주의 정치에 반기를 들었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사회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공존하기보다는 이념적으로 대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통선거권이 부여되자 사회적 갈등이 ‘혁명전야’로 불릴 정도로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더구나 29년 대공황은 실업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요컨대 서구사회는 정치적 자유, 사회적 불평등, 실업에 대한 공포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체제가 만들어낸 이율배반적인 현상으로 인해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불확실성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주의 정치는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이는 경제성장으로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동시에 사회복지 지출을 늘려 사회적 보호를 제도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장과 복지의 이러한 선순환이 실현되는 데에는 서유럽 특유의 사회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유럽 사회모델은 노·사·정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관계 관련 정책(주로 임금인상 억제를 위한 소득정책)에 합의하고 이를 실행하는 정치경제모델이다. 각국의 정치경제모델은 다양했으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녔다. 국가는 임금인상 억제에 합의하도록 노사를 유도하는 소득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임금인상 억제에 대해서는 사회정책(실업보험, 연금, 산재보험 등)으로 보상했다.
이는 ‘정치적 교환’의 결과였다. 노동은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완전고용을, 자본은 사회정책을 지원하는 대신 산업평화와 투자여건의 개선을, 국가는 정책 형성 과정에 이익단체의 참여를 용인하는 대신 정통성과 사회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 복지국가는 70년대에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서유럽 사회모델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했던 목표를 실현한 이후에는 합의의 정치가 쇠퇴하고 갈등의 정치가 심화된다는 점이다. 60년대에 완전고용이 실현되자 거의 모든 국가의 산업별 또는 단위 노동조합은 임금인상 억제의 소득정책에 반대했다. 그 결과 노사갈등뿐 아니라 노노갈등도 심화되었다.
더구나 70년대에 각국 정부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보호를 위한 지출을 급속히 늘렸다. 즉 사회정책에 대한 지출을 늘림으로써 시장의 수요를 자극하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세계화가 심화되자 정부 지출에 의한 국내수요 관리가 더 이상 완전고용을 유도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일부 강소국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 모델, 덴마크 모델, 아일랜드 모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가?



세계화 이후 서유럽 사회모델의 변화

서유럽 각국은 복지정책 전반을 재편함으로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적응하고 있다. 재편의 핵심은 사회지출을 일방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데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지출은 늘리는 대신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지출은 줄이고 있다.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조기 은퇴, 산재 및 장애보험 수급조건의 완화, 실업보험 등을 일컫는다. 실업자들을 노동시장 밖에 묶어둠으로써 실업률을 낮추고자 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수요를 자극시킬 수는 있으나 사회지출의 증대를 수반한다.
반면에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직업훈련, 취업알선 등을 일컫는다. 노동시장 안에서 고용을 증대시켜 실업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이들 국가는 생산부문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세계화에 대응하고 있다.

둘째, 사회적 대화의 내용이 확대되었다. 과거에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는 임금인상 억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 사회적 대화는 임금문제뿐 아니라 사회복지정책 전반을 다루고 있다. 덴마크의 노·사·정은 90년대 이후 ‘3자포럼’을 구성하여 임금협상뿐 아니라 질병 및 출산 보상, 연금, 직업훈련, 사회헌장 등 사회복지 이슈 전반을 논의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사회적 대화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었다. 이는 사회적 대화가 정당정치와 연계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주요한 변화이다. 과거에는 이익집단의 조직률이 높고 조직도 중앙·집중화되어 있는 스칸디나비아 및 중북부 유럽에서 사회적 대화(사회 코포라티즘이라고도 불림)가 제도화된 정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도 정당의 참여와 중재로 사회적 대화가 성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경우 이익집단의 조직률이 낮으며, 조직의 의사결정 구조도 분권화되어 있다. 특히 정당정치가 합의정치로 전환된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선거 결과 이념적 성향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연합해야만 정권을 구성할 수 있을 때 합의정치가 일상화되며, 사회적 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보자. 87년 선거 이후부터는 보수 성향의 아일랜드 전사당 또는 사민주의 노선의 아일랜드 연합당이 정치적 이념이 다른 군소 정당들과 연합해야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노사갈등과 사회적 분열로 점철된 아일랜드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경제적 기적을 이룬 시점은 이처럼 모든 정당이 “연합 가능한 정당”이 되면서부터다.

마지막으로, 시장의 조정을 통해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은 생산과정에서 임금결정, 자금조달, 직업훈련, 타 기업과의 관계 설정 등을 수행한다. 이 업무를 시장의 경쟁에 맡기는 나라는 ‘자유시장경제’로, 노·사·정 간 조정에 맡기는 나라는 ‘조정시장경제’로 분류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자유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압박하고 있음에도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은 조정시장경제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임금 조정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정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도모하는 주요 수단이다. 예를 들면 사회적 대화로 임금인상 억제를 조정하고 국가가 이를 사회정책으로 보상하는 것이다. 조정체제 자체(‘생산레짐’으로 불림)가 사회복지와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 기업은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경우 주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단기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서비스 및 금융 산업에 관심을 가지며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한다. 반면 정부 또는 은행의 조정에 의해 장기금융을 활용할 수 있는 기업은 자동차와 반도체처럼 장기투자가 요구되는 상품의 생산에 관심을 보이며 직업훈련에 적극 투자한다. 이때 사용자는 기술자들이 실직 후의 삶을 염려하지 않고 한 기업 또는 한 산업에 특화된 기술의 연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실업보험정책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

영미형 자유시장경제체제는 우리 산업의 현실과 엇박자를 이루기 때문에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주요 산업이 장기투자와 기업 또는 산업 특화기술의 연마가 요구되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등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와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우리 산업 현실과 친화적인 사회모델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시장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스스로 조정을 수행하는 제도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시장경제는 근대국가체제가 잡힌 이후에야 발달하기 시작했다. 칼 폴라니의 지적대로, 시장은 국가 및 사회와 제도적으로 맞물린 가운데 발전해왔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나라에 따라 맞물림의 정도는 다르다.
서유럽 사회모델은 시장에 대한 조정을 통해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점이 자유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하되 시장의 실패자에게 잔여적 복지를 제공하는 영미형 신자유주의 정치경제모델과 다르다. 과거 한국이 채택했던 국가주도형 정치경제모델은 노동을 배제하고 사회복지를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가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사회모델이 보여주듯이, 민주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조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국가는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경제모델을 노동과 자본에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노·사·정 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정부는 김대중 정부이다. 98년 2월에 노사정위원회와 정당은 90개에 달하는 이슈를 일괄하여 사회협약을 타결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데 노사정위원회를 이용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조정이 필요하지 않은 정치경제체제로 이행하는 데 사회적 대화를 이용한 셈이다. 결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99년 2월과 2005년 7월에 각각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노무현 정부는 성장과 분배를 주요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양자가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가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이념논쟁만 불러일으켰다. 소득정책과 사회정책을 연계시켜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도모하는 서유럽 사회모델은 우리 사회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합의정치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10%를 약간 웃돌 정도로 매우 낮으며 의사결정구조도 분권화되어 있다. 그러나 유사한 조건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노동조합이 이념 성향이 다른 세력을 포용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합의식 의사결정의 구조를 채택하면서부터 사회적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또 특정 이념을 이슈로 삼아 사용자연합과 대립하지도 않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노동운동이 대립에서 타협으로 전환한 것은 가톨릭 노선과 사민주의 노선이 하나의 노동조합(FNV)으로 통합된 76년 이후부터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념적 지향이 다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통합된다면 사회적 대화의 제도화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문제는 정치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부터 이념적 소수에 속하는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남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통령제 하에서 다당제는 합의정치의 제도화에 기여하기보다는 극단적 대립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내각책임제가 대안인가? 정당과 유권자를 연계하는 하부구조가 매우 취약한 우리 현실에서 내각책임제로 전환될 경우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현 시점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제도 개혁보다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정치다. ‘닉슨 중국에 가다’의 논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수 정당인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했기 때문에 국민이 좌경화를 의심하지 않고 지지했다는 데에서 나온 개념이다. 덴마크와 네덜란드가 복지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친복지 정당인 사민당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보수당뿐 아니라 유권자들도 사민당의 조치에 신뢰를 보낸 것이다.

정치는 사적 이익과 공적 이념이 역동적으로 맞물리며 진행되는 현상이다. 전체를 위해 때로는 자신의 이념과 이익에 반대되는 대안을 선택하는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요원한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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