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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

작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각국은 살길을 찾기에 바쁘다.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래 20여년간 승승장구해온 시장만능주의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 정권은 경제를 살린다면서 부동산 경기 부양, 금융업에 대한 투자 및 일자리 창출에 크게 의존했다. 그 수단은 규제완화, 부자 감세, 반노조라고 하는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바 있고, 그 결과는 사상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대공황이었다.

레이건, 부시 부자에 의한 시장만능주의가 가져온 것 역시 사상 최대의 빈부격차와 경제위기라는 점에서 최근 상황은 역사의 반복이다. 위기 해결책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그 기조는 뉴딜과 비슷하게 시장만능주의의 혁파,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강화, 복지 확충을 통한 분배 개선이 될 것이다.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인 한국경제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제체제는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시장만능주의가 횡행한다.

이런 시장만능주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부분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강요에 의해, 또 우리 내부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온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요구에 의해 지난 10년간 빠른 속도로 확산돼 왔다.

그러나 우리 경제체제가 시장만능주의 일색은 아니고, 시장만능주의적인 요소와 더불어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30년 정도 지속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이라고 하는 관치경제의 잔재가 도처에 남아 있다.

이 모델은 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파쇼국가에서 채택되었고, 처음에는 상당히 성과가 좋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독재적인 이 모델은 처음 20~30년은 성과가 좋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비능률, 침체에 빠지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장·분배 모두 성공한 북구 사회민주주의

우리 경제는 이런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아 한편에는 관치경제, 다른 한편에는 시장만능주의가 혼재되어 있는 기묘한 성격을 갖게 됐다. 즉 한국 경제는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물과 불처럼 상극인데, 공존하고 있으니 우리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런 혼란 상태는 하루빨리 정리돼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정리돼야 할까? 박정희식 관치경제는 한때 승승장구했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나 수명을 다했으니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시장만능주의는 이번에 미국의 경제위기로 이미 치부가 드러난 이상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에 시장만능주의 세력이 도처에 포진하여 시장만능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물론 중요하지만 시장만능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면 우리에게 대안은 무엇인가?

세계 각국을 관찰해보면 관치경제와 시장만능주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존립한 시장경제체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럽대륙형 자본주의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구형 사회민주주의체제다. 둘은 시장을 방치하지 않고 조정을 가한다는 점, 복지국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북구가 유럽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모든 중요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좀더 좌파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좌파라 하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버릇이 있는데, 놀랍게도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경제성적표를 놓고 볼 때, 우등상을 받아야 할 나라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혁신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경제성장률이 영미형이나 유럽대륙에 비해 높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가 가장 평등하다.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몇 년 전 여론조사를 했을 때 우리 국민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도 북구형 사민주의국가였다.

그러나 우리의 토양은 과연 이 모델을 이식하기에 적합한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첫째, 우리 노조의 조직률이 12%밖에 안 되는 데다 조직 형태도 산별이 아니고 기업별 노조이다. 북구는 산별노조 형태이면서 노조 조직률이 70~80%나 된다. 강한 힘에 비례적으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좀체 파업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노조는 기업별 노조여서 시야가 좁고, 경제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적게 느낀다는 한계가 있다. 노조 간부들도 단기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 기업도 살고 나도 산다는 장기적 시야가 아니라 매년의 임금 인상에만 급급하는 단기실적주의에 빠져 지나친 투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이념에도 문제가 있다. 노조 중 일부는 사민주의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심지어 기회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조차 있다.


‘가지 않은 길’을 갈 용기는 있는가

둘째, 기업가들은 원래 보수적이지만 한국의 기업가들은 특히 보수적이다. 노사 대화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으며, 경영권·인사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약간의 발언조차 허용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에 빠져 있는 기업가가 많다. 심지어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노동조합 자체를 아예 불순한 조직 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극우파적인 사고방식도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북구와 같은 노사 대화와 그에 기초한 산업평화, 고숙련, 고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것이다.

셋째, 정부의 성격으로 한국의 정부는 너무 보수적이다. 보수정부가 연이어 집권해왔으며, 사민주의 정당은 아예 정치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다. 정부는 거의 항상 노동자보다는 기업가 편에 서 있으며,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조치도 드물지 않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일본 자민당이나 미국 공화당처럼 부자 우대, 반노동자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넷째, 국민 의식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북구형 사회를 희망하면서도 그런 사회를 위해 높은 세금을 내겠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아주 소극적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독재시절부터 내려온 반공 교육이 너무나 철저해 우리 머릿속에는 약간의 좌파적인 생각조차 배척하려는 편협함이 있다. 그래서 북구형 사민주의조차 생소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 인구 문제다. 북구는 모두 인구가 적은 나라인데, 우리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이런 모델이 안 맞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사민주의에 결정적 장애라고 볼 수는 없다. 인구 소국은 우리와 안 맞는다고 하면서 미국이나 일본 같은 인구 대국의 관행은 열심히 답습하려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런 저런 제약 때문에 우리에게 북구 모델은 너무나 멀리에서 깜박이는 등불일 뿐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중차대하다. 오래 누적된 관치경제의 폐단도 씻어내야 하지만 10년간 과잉수입된 시장만능주의의 병폐도 심각하다. 정치의 독재뿐 아니라 시장의 독재도 피해야 한다. 관치경제(정치 독재)도 시장만능주의(시장 독재)도 옳은 길이 아니다.

양쪽 늪을 피하면서 제3의 길로 가는 외나무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한다. 이 길을 통해서만 경제위기 극복이 가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 세계 최고기업인 핀란드의 노키아 회장 요르마 올릴라가 올해 3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구형 모델이 자본주의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관건은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용기와 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일찍이 50년대에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선생은 사민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정통 공산주의자가 점차 생각을 바꾸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함께 해결할 만한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모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죽산 선생은 놀랄 만한 선견지명을 가졌던 인물이다. 옹졸한 이승만 정권이 59년 죽산 선생에게 억지로 간첩죄를 씌워 처형함으로써 그의 높은 뜻은 안타깝게도 푸른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 국민이 좌파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과 오해를 떨쳐내고, 과연 어떤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인지를 생각할 때가 왔다. 경직적 좌파, 독재적 좌파는 나쁘다. 이에 반해 북구에서 보는 인간적 좌파, 민주적 좌파는 전인미답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해왔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넘어 멀리 보자. 언제까지 우리 국민이 시장만능주의와 관치경제 사이에 협착돼 고생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산 선생이 가신 지 어언 50년,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하면 언제 그런 때가 온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아예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기비하다. “원래 길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고 한 루쉰의 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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