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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년들이 힘들다지만 우리 중년들도 똑같이 힘들거든요.” 부모님 세대 앞에서 청년 문제에 대해 강연할 때 받았던 질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양극화된 소득과 지속가능하지 않은 일자리, 적은 소득에 비해 과하게 지출되는 집세와 대출금, 제도권 정치 안에서 과소 대표되어 발언권조차 없는 현실, 젠더 불평등과 수도권 밖에서 살아가는 지역 청년의 한계까지…. 이쯤이면 충분히 얘기했다 싶었던 강연의 끝에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부단히 힘들다 넋두리를 한 21세기 청년과 21세기에는 중년이 되어버린 20세기 청년이 남아있었다.

청년 문제에 대해 진단하고 정책적 대안을 처방하는 일은 다른 세대의 고통을 배제하며 그로 인한 세대 갈등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 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모든 세대의 삶을 관통한다. ‘왜 우리는 양극화된 소득과 일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 ‘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집이 있는 달팽이와 집이 없는 민달팽이로 나뉘게 될까’ ‘왜 우리는 현재를 위해 미래를 담보로 살아가야 할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 두 세대의 고민이 같은 좌표에 찍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지난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한 불평등은 대물림된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는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민주주의와 정의, 공정성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가치에 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은 청년 세대에서 익숙하고도 새롭게 고착화되는 중이다.

경직된 공정성이 시대정신이 되고나서부터인 듯하다. 생존을 위해 노력을 인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 자라온 청년 세대에게 공정성을 지키는 문제는 선인과 악인을 가를 선명한 잣대가 되었다. 이제는 채용 과정에서 대학 서열이나 병역 여부에 따라 부여되는 가산점의 근거이고,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했다. 시험이라는 절차를 통해 개인의 노력이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여기는 한, 노력의 여하에 따라 금전적, 사회적 대우가 차이나는 것은 불공정한 것도, 불평등한 것도 아닌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공정성이 불평등을 만든다는 이 시대 역설은, 경쟁이란 민낯을 공정이란 가면으로 감추어 낙오된 나머지를 불평등한 사회에 희생시킨다는 사실로 풀이된다. 여기서 모두가 합의한 것처럼 보이는 경쟁과 그에 어울리려는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일수록 무임승차자로 낙인찍혀 박탈되는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는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공정성은 평등한 경쟁이 존재할 거라는 신화의 미사여구로 쓰일 뿐이다.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야속하지만 내 능력 밖의 운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구조화된 불평등을 내재한 사회에서 소득수준과 학력은 물론이거니와 젠더, 종교, 지역, 장애 여부 등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없다.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을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무효하다.

우리는 사회가 조금씩 진일보할 때마다 어디에선가 무임승차자가 되곤 했다. 나도 몰랐던 순간 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받아왔던 때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살자고 노력해왔던 사람들의 힘이 모였을 때라는 것을 기억하자.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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