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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일본 교육개혁심의회가 논서술형 대학입시 도입을 고리로 교육개혁을 추진할 것을 권고하여 일본 문부성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시행 과정에서 점점 용두사미가 되는 감이 있어 썩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왜 야심차게 출발한 일본의 대학입시 개선을 고리로 한 교육개혁이 점점 용두사미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혁에 대한 저항 등 무언가 거창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입 개선을 고리로 한 교육개혁은 오랜 기간 논의를 거쳐 상당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저항은 없었다. 이유는 그런 거창한 것에 있지 않고 공기와도 같아서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디테일에 있었다. 그 디테일이란 일본이 수십만 학생의 논술 답안을 단기간에 이의제기가 어려울 정도의 객관성을 가지고 채점해낼 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대학입시는 논술로까지 나가지 못하고 최대 80자에서 120자 정도의 서술형 주관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개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중국의 대입 국가고사는 일본보다는 형편이 나아 보인다. 선다형도 단순 사지선다형이나 오지선다형이 아니라 다양하고, 서술형과 800자 분량의 논술형이 작문 과목의 문항으로 도입되어 있다.

어쨌든 아직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과 일본이 위와 같이 논서술형 대입 국가고사에 관심을 갖고 힘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것이 미래사회에 필요한 학생들의 역량을 측정하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국가적 차원에서도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측정해낼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입개혁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측정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대학이나 초·중등학교가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키우고 평가하도록 유도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가 학생들의 미래역량을 측정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디테일 속의 악마는 교육개혁 진전에 전반적 한계로 작용하게 된다.

디테일 속에 숨어 있는 악마는 대입정책에만 있는 건 아니다. 얼마 전 외국어고등학교 축소 폐지 문제를 다루는 작은 토론회가 있었다. 정책 제안 설명을 듣다가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학교가 되어버린 외고를 중장기적으로 축소 폐지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정책이 그것뿐이라면 외고 문제를 너무 중산층 중심으로만 보는 게 아니냐. 도 단위에 가면 중하위권 아이들이 정말 그 외국어가 좋아서 진학하는 외고도 있다. 또 다문화 아이들의 비중이 2%를 넘어서는데 그 아이들이 다문화 다언어의 장점을 적극 살려나갈 수 있도록 아시아 외고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 아이들 중 우수한 아이들을 국가적으로 지원하여 하노이대든 어디든 유학 보내고, 양국 사이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울 필요도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적극적 대안도 같이 제시해야 대의명분이 서고, 그래야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외고를 단계적으로 축소 폐지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 거다.”

기실 나는 근래 1~2년간 다문화의 우수한 아이들이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는 아시아 외고를 만들 수는 없는 걸까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지금 다문화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부 부서는 교육기회보장과인데 전에는 특수교육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국가가 부서의 명칭을 통해 공식적으로 다문화를 장애나 결손으로만 보고 있다니! 사회적 합의 수준이 여기서 몇 걸음만 더 뒤로 가면 내부 인종주의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아시아 외고를 세우는 게 다문화 아이들을 귀중한 사회적 자산으로 삼는, 새로이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상징적 행위들을 통해 사회적 합의 수준이 높아져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알아본 곳은 제주특별자치도의 국제학교 특구였다. 제주도의 국제학교들은 법적으로 5%의 제주도 일반 아이들을 장학생으로 받도록 되어 있는데 제주도 아이들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 5%를 다문화 아이들에게 돌리면 아시아 국제고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국제학교 특구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주도 아이들도 꺼리는 우리나라 최상층 학부모를 둔 자녀들 속에서의 소외감을 다문화 아이들이 견디는 건 불가능하리라 보였다. 나는 돌아오면서 이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는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근대적 서구 중심주의일 것이다. 서구와 비서구를 문명과 비문명으로 나누는, 아서구(서구의 아류)로서의 한국과 동남아를 문명과 비문명으로 나누는 이 낡은 시각은 사실 인종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러고 보면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는 결코 사소한 놈이 아니라 미래로의 변화를 가로막는 낡은 통념의 거대한 벽이란 걸 알 수 있다. 이 디테일 속의 악마를 넘어서는 것은 참으로 지루한 싸움이지만 그것이 실력이고, 실력이 쌓이지 않으면 미래를 향한 변화는 가능하지 않다. 개혁 논의가 자주 미로에 빠지는 것은 이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와의 지루한 싸움을 피하여 지름길을 찾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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