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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어머니 생신이라 가족이 모였다. 바깥에서 외식하고 집에 돌아와 케이크를 자르는 게 평상시의 코스다.

이날은 형이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했다. 부모님 댁과 가까운 수원역 롯데몰에서 만나 <신과 함께-인과 연>을 보고 냉면을 먹기로 했다. 영화 시작 40분 전에 도착하니 주차장 입구가 차들로 꽉 밀려 있었다. “주차하는 데 1시간 걸립니다”라는 안내 팻말이 보였다. 사람들이 폭염을 피해 몰려왔구나.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시냐 물으니 아버지가 운전해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차들이 밀려 있단다. 영화 시작 40분 전이라 좀 고민이 됐지만 설마 1시간이나 걸리랴 싶어 계속 서행하며 기다렸다.

쇼핑몰의 주차장은 지상이었다. 아니, 아까 지하주차장이라고 했는데…? 규모가 커서 지하에도 지상에도 있는 거구나 싶었다. 옥상까지 올라가서 차를 대고 시계를 보니 영화 시작 20분 전이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옥상 주차장에 차를 댔다고 말씀드렸다. 옥상은 5층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9층 티켓박스로 오라고 하신다. 아무 의심 없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까지도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티켓박스로 향하는데 형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어디냐기에 거의 다 왔다고 하니 수화기 너머로 탄식이 들려온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귀를 의심케 했다. 부모님이 산본역 근처 롯데피트인몰에 계시다는 것이 아닌가. 거기도 롯데시네마가 있다. 정리하자면 형네 가족과 우리는 수원역 롯데몰로 왔고 부모님은 산본역 롯데몰로 가신 것이다. 길이 엇갈렸다. 산본역은 형이 사는 동네다. 평소 직장에 나가는 형네 부부를 대신해서 조카들을 돌봐주러 매주 부모님은 산본에 가신다. 얼마 전에 어머니는 조카들과 산본역 롯데시네마에서 <미션임파서블-폴아웃>을 보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 기억을 믿고 산본역으로 착각하셨던 것이다.

형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연로하신 부모님을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장소를 건성건성 말씀드려 이게 무슨 꼴이냐는 생각에 짜증이 솟았다.

차를 빼서 다시 수원역으로 오시는 중이라는데 영화 시간을 맞추기는 글러먹었다. 시간표를 보니 다음 영화는 저녁 7시였고 그나마 표도 없었다. 결국 영화 관람은 무산되었고, 밥이나 빨리 먹자 싶어 7시에 예약해둔 식당에 전화를 걸어 시간을 당기려고 하니 손님이 많아 안 된다고 한다. 혈압이 올랐다. 구겨진 표정으로 우리는 그냥 집에서 헤쳐 모이기로 했다.

이게 큰 그림이고 그 안에 작은 그림이 하나 더 있다. 그날 가족이 다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아내는 영화를 보기 싫다는 것이다. 대신 영악하게도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근처에 대학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살고 있으니 우리가 영화를 볼 동안 자기는 친구를 만나겠다는 것이다. 러닝타임이 140분인데다 40분 일찍 도착했으니 거의 3시간이 확보된다. 친구와 한판 수다를 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녁에 교회에서 중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친구를 어렵게 불러내 영통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산본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아내는 친구와 만나서 ‘반갑다’ ‘어떻게 지내니’ 정도만 이야기하고 헤어져야 했다. 나는 복잡한 쇼핑몰을 빠져나와 그 친구가 사는 영통구까지 가서 아내를 데리고 케이크를 사서 다시 부모님 댁으로 오느라 형이나 부모님보다 훨씬 늦게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문을 여는데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에서 삼겹살이나 굽자고 하신 모양이다. 형이 어머니가 먹고 싶다고 한 냉면을 포장해와 식탁엔 삼겹살과 냉면과 만두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음식만 보면 즐거워지는 우리 가족은 좀 전의 일은 까맣게 잊고 삼겹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배를 좀 채우고 나자 화제는 다시 ‘산본 사태’로 집중되었다. 가족모임을 산본과 수원으로 양분하지 말고 한곳으로 몰아야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둥, 단톡방을 시급히 개설해야 이런 일이 미연에 방지된다는 둥, 지하로 내려가고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서로 이상한 걸 몰랐냐는 둥 화제는 끝이 없었다. 웃다가 가만히 조감해보니 엇갈린 약속 하나로 이렇게 즐거워질 수 있는 우리의 소박한 삶이 오롯이 떠올라왔다. 아버지는 영화관에 가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삼겹살에 소주를 드시고 말도 실컷 하셔서 흐뭇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을 중간에 끊고 구박과 반론과 실소를 던지는 재미에 신명이 난 표정이었다. 신명이 났으니 어쨌든 신과 함께한 저녁이었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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