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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어울려 잘 살아야 하는 공동체에는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서로의 존엄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관습이나 문화 등을 통해 전해지는 규칙이 있는가 하면 학교의 학칙, 단체의 정관과 내규, 국가의 헌법 등과 같이 문서의 형태로 존재하는 규칙이 있다. 대체로 규칙은 구성원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와 그 권리를 보장하고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책무이다. 원론적으로 규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이고 약속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규칙은 합의나 약속의 주체인 내가 그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부터 존재한다.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처음에만 모르면 다행인데 끝까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 또한 헌법의 존재는 학교에서 배웠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몰랐다. 윤민석씨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노래를 만들기 전까지 헌법은 단지 시험 성적을 위한 암기사항일 뿐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활동하는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오면 정관과 내규에 대한 안내시간을 꼭 갖는다.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와 책무에 대한 안내와 함께 문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체적인 맥락과 기존 구성원들의 다양한 고민, 그리고 규칙이란 상황의 변화와 현재 구성원들의 논의와 합의에 따라 늘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늘 어려움과 한계는 존재한다.

헌법이 개정된 지 30년이 지났다. 첫 번째 탄핵의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았고 촛불혁명으로 부패한 대통령을 탄핵한 두 번째 경험을 통해 헌법의 힘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의미와 힘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의 낡은 틀, 아니 70년 전의 낡은 틀로는 혁명적 변화를 이룩한 현실사회를 반영할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은 깨달았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과거 정치권 중심의 개헌 논의와는 다른 지형을 만들고 있다. 국민이 주도하는 기본권 중심의 개헌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과정에 여성들도 더 이상 국가의 보호나 통제의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참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과 불평등 구조를 바꾸고 더 넓고 더 깊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약속을 헌법에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여성의 관점으로 자유권, 평등권, 사회권을 재해석하고 세상과 사람의 변화를 반영한 가족 구성권, 재생산권, 돌봄권 등 기본권의 확장을 통해 성평등 헌법으로의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권은 과거의 낡은 인식에 갇혀 있다. 학칙이 필요한 순간은 오직 규칙을 위반한 학생을 벌할 때뿐인 과거 학교당국의 인식.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국민은 여전히 통치와 통제의 대상으로 두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몰두하며 권력구조 개편에만 집중한다. 국민들은 시민으로 진화했는데 정치권은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서 제자리걸음이다. 정치권은 국민들의 개헌 욕구가 무엇인지 직시하고 성평등 개헌에 집중해야 한다. 아니면 영영 퇴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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