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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현실이 존재하는지 알아야만 이해로 이동할 수 있다. 존재 자체도 모르면서 이해를 말하는 것은 만용이다. 특히 일상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말하게 하고 더 잘 듣고 깊이 성찰해야 한다.

몇 해 전 전동휠체어로만 이동이 가능한 분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예약된 식당에 갔다가 곤란을 겪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분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분의 존재를 알았지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휠체어에 앉아 식사가 가능한지를 고려하고 식당을 정하지 못했다. 번번이 민망해하며 반성하지만 그런 일은 쉬이 개선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경험의 차이, 위치성이 갖는 한계라고 여긴다. 만일 그분과 동일한 위치성을 가진 사람이 식당을 예약했다면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5월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등장한 여성들의 추모 물결, 분노와 행동은 한국 사회에 변화를 촉구했다. 남성과 여성들의 일상은 다르게 구성되고 있고, 그 현실에 주목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기획할 수는 없음을 알게 했다. 여성들은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침묵하며 살지 않겠다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지난겨울 촛불광장에서도 성차별적 발언이나 여성혐오적인 모든 행태에 대해 저항하며 변화를 만들어냈다.

성평등한 민주주의는 시대적 요구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광장의 힘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희망 속에서 탄생했다. 시대적 소명을 받들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성평등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모든 부처의 정책이 성평등 실현을 목표로 추진되는 체계를 갖추고, 초기 내각 30% 여성 임명, 임기 내 남녀 동수 내각 실현을 약속했다. 솔직히 기대감이 많았다. 취임 당일 첫 인선 발표에 조현옥 인사수석이 포함된 것을 봤을 때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말 약속을 지키는구나, 문재인 대통령이 이렇게 성평등 대한민국을 향한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구나.’ 감동했다.

그런데 취임 50일이 지난 지금 더 이상 기대를 하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문재인 정부의 장관 내정자 15명 중 여성은 4명(26.7%)이다. 차관은 전체 22명 중 단 2명(9.1%)뿐으로 그것도 교육부와 여성가족부이다. 청와대 인선 상황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확인된 인사 현황에 따르면 전체 비서관 42명 중 여성 비서관은 8명(19%)뿐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 낙마,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거취 논란 등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성차별적 인식을 가진 인사들의 기용이다. 이런 부조화가 없다.

인사검증 기준은 문재인 정부가 어떤 가치와 비전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의 인사검증 기준에 성평등 관점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많은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은 성평등한 인사정책의 기본 철학과 가치를 성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기준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기회는 있다. 이제라도 성평등 관점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게 변화의 첫걸음이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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