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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가장 싫다. 광장에 있을 때엔 민주주의의 중심이었던 나는 광화문에서 한 발자국 떨어지자마자 세상의 주변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일하고 있으나, 저번 달보다 5만원이나 높아진 월세에 허덕이며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한번 꿈꾸지 못하는 삶. 누가 이 주변부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기나 할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로 청년실업률이 최대치를 찍었다든가,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육박한다든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5만원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방이 6평도 채 안된다든가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환경에서 토요일마다 촛불을 드는 삶이 견딜 만할 리가 없다.

거기에다가 ‘뭐가 그렇게 불편해?’ ‘왜 그렇게 예민해?’ ‘나 때는 다 그랬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나마 중심이 된 것 같았던 광장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변부 사람이 된 것 같아 더욱 외로워진다. 광장에서의 나는 허상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가난하고 외로운 주변부 인생으로 만든 것은 청년의 낮은 투표율과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라던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르바이트, 학업, 스펙 쌓기 등의 경쟁적 삶에 내몰려 참여할 여력이 부족했던 것일 뿐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훈련해온 세대이다. 수평적인 문화를 최우선시하고, 다양한 담론을 나누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덕분인지 광장에서 청년의 영향력이 커지자 약자 혐오적 욕설을 자제하고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배려하는 평등한 집회를 위한 가이드라인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느냐’는 말을 들었을 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아직도 먹고사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사람답게 사는 일은 조금 뒤처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싶어 입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수많은 촛불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저들 중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을 때나 가장 박한 일을 할 때가 아니라 내 편이 되어줄 이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일 텐데.

그래, 어쨌건 지금은 부단히 일상의 촛불을 켜는 일이 우선이다. 가장자리의 제일 어두운 곳에 빛을 들이고 곪은 것은 양지바른 곳에 다 꺼내두자. 그것이 저마다의 일상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법이다. 선배님에게는 멋대로 말 놓지 말아달라고, 사장님에게는 주휴수당 챙겨달라고, 부장님에게는 너무 사적인 것까지 묻지 말아달라고 얘기하자. 혼자 하는 것이 무서울 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함께하자고 제안해도 좋다.

“旗前進·人不進(기전진·인부진), 깃발은 앞에서 가나 사람은 앞으로 가지 않는다. 촛불 한 대,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촛불이 같은 초 천 자루 만 자루에 불을 켜놓을 때 거기에는 해와 달을 부러워하지 않을 큰 빛과 열이 일어난다.”

‘삼천리’라는 잡지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1931년 1월1일자 글의 일부이다. 80년이 지난 글이라고 하기가 무색할 만큼 요즘의 촛불을 그린 듯하다. 지난 12주 동안 몇 번이고 새로운 촛불을 밝힌 것은 광장에 나온 모두였다. 날도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한 1월 중순, 이제는 그만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되길 헌법재판소를 바라보며 기도해본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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