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정책으로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친(親)노동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의 편에 섰다. 대기업의 독점을 용납하지 않았고, 금융시장 규제를 강화했다. 보수세력과 자본가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될 만했다. 루스벨트는 1933년 첫 취임 연설에서 밝힌 대로 “돈과 이윤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헌신해야 경제 재건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른바 ‘와그너법(Wagner Act)’을 제정해 노조결성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했다. 노동시간을 규제했고, 아동노동을 금지했다. 뉴질랜드가 1894년 처음 도입한 최저임금제를 미국 노동시장에 착근(着根)시킨 것도 루스벨트였다. 그는 1938년 ..
이제야 후보들 복지 공약의 대략을 알게 되었다. 지난 월요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들의 10대 공약을 공개한 덕택이다. 선거가 고작 3주 남은 시점에서 말이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정책 공방보다는 후보 자질, 선거 구도 등이 부각될 텐데 앞으로 얼마나 실질적인 토론이 이어질 수 있을까? 매번 대통령선거 때마다 뒤늦은 공약 발표에 문제를 느껴왔다. 이번에는 아무리 조기대선이라도 너무하다. 유력 후보들이 일찍부터 대선을 준비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선거만큼 자신의 뜻을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진정 자신의 국정 계획을 유권자에게 알리고 싶다면 하루라도 빨리 공약을 내야 했다. 치열한 논의를 거친 공약일수록 실행 가능성도 높다. 널리 공론화되고 점검된 공약을 근거로 승리했기에 집권 이후 정책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대구에서 유세를 시작했다. 그의 첫 유세 장소는 2·28민주운동 기념탑 광장이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 2·28민주운동은 1960년 2월28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최초의 저항운동이었으며 4월혁명의 ‘출발’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은 대구의 2·28에서 시작하여 마산의 3·15를 거쳐 서울의 4·19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출발이 대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대구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촛불민심의 대변자로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보이려 하는 것 같다. 이런 문재인 후보의 노력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대구는 민주화 이후 한번도 민주당을 밀어주었던 적이 없기 때..
세월호 참사 3주기 추모식이 16일 안산·목포신항·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대선후보들은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3년 기억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였다. 홍 후보는 “정치권에서 얼마나 많이 우려먹었나. 더 이상 정치에 이용하는 그런 것을 안 했으면 한다”고 불참 이유를 설명했다. 한마디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지난해 2년 기억식에 참석했던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불참했다. 그 이유는 군색하게도 예년과 달리 대선 정국을 맞아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기억식에 불참한 채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회 국민안전의날 국민안전다짐대회에..
문재인·안철수 전 대표가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나도 참여해서 한 표를 던졌다. 두 사람 외에는 사실상 유력 후보가 없다 하니 어쨌든 정권교체가 확실하고, 그러면 이제 ‘촛불혁명’의 2단계란 것도 달성되는 건가? 그런데 뭔가 매우 찜찜하고 부족하다. 굉장히 익숙한, 김 빠진 국산맥주를 종이컵에 부어 들이켜는 듯한, 외려 더 목마르고 답답해진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호사가 ‘아재’들이나 종편은, 매일매일 몇 자 구도, 여론조사 산수놀이에 열을 올리고, 별 논쟁거리도 안될 논쟁을 만들어내는데 왜 이런가? ‘아름다운 경선’이었다 자찬들도 하는데, 나 자신 지난달 자동응답(ARS) 전화투표 참가 신청할 때와 마음가짐이 달라져버렸다. 이른바 ‘어대문’ 상황이라 그런가? 그렇진 않다. ..
바른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유승민 후보가 승리했다. 유 후보는 어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당 19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대회에서 남경필 경기지사를 꺾고 원내교섭단체 정당의 후보로는 가장 먼저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하지만 유 후보는 최근 지지율이 3%를 넘지 못하고, 당 지지율도 자유한국당은 물론 비교섭단체인 정의당에도 밀리고 있다. 보수당을 분열시킨 배신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며 개혁보수의 길을 연 것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공당의 대선후보라는 영예를 안은 유 후보는 다른 당·후보와의 연대를 모색하면서 당의 활로를 열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았다. 바른정당은 창당 후 두 달 동안 형식과 내용에서 의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대선 경선에서 대본 없는 토론, 정책 중심의 토론 등 정치..
안희정은 비운의 세자다. 2002년 12월21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안희정도 불렀다. “국민 앞에 털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미리 다 털고 가자.” 안희정은 1994년 노무현을 만난 이후 줄곧 살림을 담당했다. 안희정은 대선자금 수수 총대를 메고 구속됐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문재인은 “안희정은 정말 가혹하게 당했다. 본인 책임이 아닌 일까지도 안아버렸다. 민정수석으로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문재인의 ).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정부로 입성할 때 안희정은 바깥에 혼자 남았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 한번 하자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안희정은 “본진은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