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와 220만 대학생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에서 ‘청년의 꿈이 나라의 미래를 바꾼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좌석에 앉아 있던 한 대학생이 강연 도중 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씨의 얼굴 사진과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연사로 초청된 정의화 국회의장이 무대에 서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하며 사건의 은폐·축소를 방조한 의혹을 받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정 의장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던 때였다. 결국 정 의장은 지난 6일 임명동의안을 직권상정했고,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채 새누리당 의원들 단독으로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7일 이 대학생에게 ..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헌법 정신에 대한 배반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검찰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인물이 기어코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관에 앉았다. 새누리당은 어제 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동원, 야당이 불참한 가운에 임명동의안을 단독 표결 처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에 연루된 박 후보자가 정상의 절차마저 거치지 않고 ‘반쪽 대법관’에 오른 셈이다. ‘박종철 사건’은 민주화를 요구한 젊은이를 고문해 죽인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이다. 이 사건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 대법관에 오른다는 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많은 국민들은 물론 법원 내부에서마저 반대 목소리가 높았던 이유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힘을 앞세워 밀어붙이기로 일관했고, 새정..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내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선다. 임명동의안이 제출된 지 70여일 만의 일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은폐한 검찰 수사팀의 일원이 사법정의와 인권옹호의 보루인 대법관이 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불행이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나기를 권고한다. 그러나 기어코 청문회에 나오겠다면 철저히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 청문위원들은 오늘 이 땅의 민주주의가 박종철씨의 죽음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87년 2월 서울지검 수사팀은 박종철씨를 고문한 경찰관에게서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2명만 기소한 채 사건을 덮었다. 검찰은 5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범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폭로한 뒤에야 2차 수사팀을 구성해 이들을 추가로 기소했다. 1·2차 수사..
1980년대는 열사의 시대였다.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숱한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조사실에서, 외딴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죽어갔다. 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의 나이는 23세였다. 그해 6월 거리에서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나이는 21세였다. 88년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한 박래전의 나이는 25세였고, 89년 여수 거문도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이내창의 나이는 27세였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서울지검 형사2부 검사로 있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차 수사에 참여했다. 임관 4년차이던 박 후보자는 수사팀의 막내 검사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수사는 엉망이었다.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수사가 아..
2015년 한국 사회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다거나, 국가가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군부대에 감금한 채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2015년 현재를 사는 한국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경찰관들이 무고한 시민을 고문하고 죽인다거나, 이들을 수사하던 검사가 고문에 참여한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덮어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된다. 1980년 6월 이완구 경정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 파견됐다. 내무분과위는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 사건에 관여했다. 국보위는 사회정화를 한다며 영장도 없이 6만여명을 붙잡아 4만여명을 군부대로 끌고 갔다. 당시 20대였던 이 경정은 국보위 근무 공로로 훈장을 받았고, 2015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