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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내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선다. 임명동의안이 제출된 지 70여일 만의 일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은폐한 검찰 수사팀의 일원이 사법정의와 인권옹호의 보루인 대법관이 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불행이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나기를 권고한다. 그러나 기어코 청문회에 나오겠다면 철저히 검증하는 수밖에 없다. 청문위원들은 오늘 이 땅의 민주주의가 박종철씨의 죽음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87년 2월 서울지검 수사팀은 박종철씨를 고문한 경찰관에게서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2명만 기소한 채 사건을 덮었다. 검찰은 5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범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폭로한 뒤에야 2차 수사팀을 구성해 이들을 추가로 기소했다. 1·2차 수사에 모두 참여한 박 후보자는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 외압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특히 수사팀의 말석 검사로서 수사를 주도할 위치가 아니었고 권한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말석’이 면죄부의 필요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직급이나 임관시기와 관계없이 모든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이다. 박 후보자가 외압을 알았건 몰랐건 최소한 부실수사를 한 정황은 분명해진 터다. 1차 수사기록을 분석한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박 후보자가 고문 경관 강모씨에게 7시간 동안 96차례 질문을 했지만 공범의 존재나 상급자 지시 여부는 묻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박 후보자가 기소 전날에야, 후일 공범으로 밝혀지는 반모·황모씨를 참고인으로 조사했다”며 “그러나 질문의 3분의 2가 박종철씨 연행시간에 대한 것일 만큼 형식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재판기록 등을 보면, 1차 수사에서 박 후보자는 강씨를 상대로 ‘반모씨가 주범인데 왜 강씨가 주범으로 돼 있느냐’고 추궁하다 답변이 없자 그냥 넘어간 것으로 나온다. 강씨는 최근 ‘박 후보자 등 검사들이 박종철씨를 담당한 주무 경찰관이 누구인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상옥 대법관 후보 임명반대 공동 성명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 후보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에도, 무고한 시민을 물고문한 혐의로 입건된 경찰관을 불구속 처분했다.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자성도 없었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과거에도 대법관 후보자가 임명동의 과정에서 개인비리 의혹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일은 있다. 그러나 박 후보자의 경우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폭력과 야만과 허위에 죽음으로 맞서 쟁취한 한국 민주주의의 가치와 직결된 문제다. 박 후보자가 대법원에 입성한다면 민주화에 헌신한 영령과 그 가족들을 대할 낯이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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