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에 살고 있는 민주세력은 박정희 신화와 싸우고 있다. 우리의 상대는 박근혜나 새누리당이 아니라 박정희다. 박정희를 가리키는 ‘반신반인’이라는 말에 모두 놀랐겠지만 이곳에서는 이 말이 오히려 겸양이다. 이곳에서 그는 온전한 ‘신’이다. 샤먼이다. 박정희 초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복하는 모습을 이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박정희 신화를 재생산하는 일은 쉬지 않고 진행됐다. 박정희 동상을 크게 세우고, 그의 최대 치적이라고 하는 새마을 담론을 동원하면서 박정희 신화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박정희와 싸우는 일은 참 어렵다. 신화는 맹목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보다도 강력하다. 이데올로기는 어떤 가치와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이지만 신화는 조건 없이 따르는 것..
정부가 어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공개했다. 교육부는 여론 수렴 후 내년도 학교 현장 적용 방안을 결정할 방침이다. 이준식 부총리는 “역사적 사실과 헌법가치에 충실한 국정 역사교과서를 편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장검토본은 우려했던 대로 헌법가치를 부정하고 편향적 역사인식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장검토본은 1948년의 이승만 정부 수립을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으로 표현했다.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승만 정부라는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한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친일파를 ‘친일세력’으로 완화하고, 친일 관련 서술을 줄인 것도 이해가 안된다. 정부가 앞장서 건국 97년의 역사..
서울 광화문 일대, 본래 맘 편하게 걷는 곳이 아니다. 머물러 있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곳곳에서 전경과 마주칠 수 있기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빨리 지나가고 싶은 거리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효자로, 그리고 자하문로를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그 기분을 안다. 2016년 11월26일 다섯 번째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그날에 모인 군중은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곳까지 행진했고 그들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야하라”고. 그날 군중의 한 명이 되어 세종대로를, 사직로를 그리고 종로를 오후 3시부터 그다음 날 새벽 1시까지 걸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아침이슬을 맞겠다는 즐거운 결기로 무장한 이 거대한 인간의 집합체를 관찰했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채집했다. 도시의 차량을 통..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기어코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체제의 매듭을 짓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문재인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박근혜만은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이고 규칙이므로. 박정희를 존경했기 때문에 박근혜를 좋아했던 유권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보은(報恩)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북한의 위협을 이겨냈고 이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딸을 꽃가마에 태우는 것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수미상관한 매듭이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매듭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작동했지만 점차 효용을..
최순실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때아닌 샤머니즘 열풍에 휩싸였다. 나라 밖 언론조차 한국이 샤머니즘에 빠졌다고 보도할 지경이다.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처벌하고 이를 방조 또는 주도한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과 별도로 이 기회에 샤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지금 언론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샤머니즘이라는 단어는 하나같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1세기에 샤머니즘이라니? 어이상실!” “우리가 그럼 무당X을 받들고 있었다는 거임?” 등이다. 여기서 샤먼은 인민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무당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샤머니즘이 ‘나쁘고 사악한 것’이라고 사람들의 뇌리에 일방적으로 각인되는 게 문제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겠다. 이 나라는(북..
통합된 국민의사에 반하는 대통령의 아집으로 나라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면은 혼미하나 민의는 하나다. 남녀와 세대와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어 6월항쟁 이후 지금처럼 압도적인 국민통합과 단일의사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최고위급 인물들이 줄줄이 소환·구속되는 데서 볼 수 있듯 청와대는 이미 부패의 핵심이자 범죄소굴이었다. 그 범죄자들에게 대통령은 나라의 최고지도자인 동시에 자신들의 범죄를 가능케 해준 두목이었다. 퇴임 이후 문서를 반출한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자기 정부의 공직기강비서관과 특별감찰관을 ‘국기문란’ 사범으로 정죄한 대통령(과 여당)은, ‘현재의’ 국가기밀을 계속 반출하도록 조장·허용·묵인하는 국기문란행위를 자행한 자신에 대해서는 탄핵을 포함해 훨씬 엄한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로 청와대를 장악했던 박정희 소장. 그는 시청 앞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나, 2년 동안만 군정을 한 뒤에 민정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김종필에게 지시했다. 공화당 창당 등 쿠데타 세력의 정치참여를 위한 철저한 준비를 은밀하게 시작했다. 2년 뒤 박정희와 김종필은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여했다.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정치를 하니 약속 위반은 아니라고 했다.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 국회 별관. 박정희의 개인적 정치도구로 전락한 공화당 의원들은 대통령의 3번 연임을 골자로 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김대중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던 박정희는 1971년 대선 마지막 유세에서 “이번 선거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는 마지막”이라고 약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