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 틀림없어. 평일 아침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허름한 배낭을 멨다. 게다가 버스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분명 간첩이야. 저걸 어떻게 신고하지? 가다가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워야겠다.’ 1970년대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6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도 아니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아홉 먹은 멀쩡한(?) 청년, 게다가 버스 운전사였다. 그런데 아침에 내가 모는 삼화교통 333번 버스에, 어릴 적 반공 세뇌 교육으로 배운 그런 간첩 행색의 남자가 탔다. 나는 룸미러로 그자를 훔쳐보면서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파출소에 버스를 대고 얼른 뛰어가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이 와서 조사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요..
2016년 10월에서 12월에 걸쳐 한국에서 벌어진 평화시민혁명의 의미를 지금 가늠하기에는 너무 이른지도 모르다. 일단은 잠정적 진단으로 봐주시길 바란다.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투쟁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통과를 이끌어냄으로써 1차 관문을 통과했다. 2만명에서 시작한 집회는 매번 참가자가 늘어나 급기야 2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전국에서 참여하는 초거대 집회로 발전했음에도 순조롭게 열렸다. 정말 놀랍게도 부상자, 구속자 한 명 없이 평화롭게 순항했다. 세계가 놀랐고 우리 자신도 놀랐다. 우리는 이 세기적 평화시민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가능했는지 곰곰이 헤아려야겠다. 이 진지한 점검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가 걸려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필자는 ..
헌법재판소에 제출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반박 답변서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저지레를 ‘키친 캐비닛’이라고 한 모양이다. 소가 웃을 노릇이다. 밥만 먹고 이야기만 들었다면 키친 캐비닛이라 한들 뭐라 하겠는가? 그런 거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무엇인가를 도모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두 사람이 한 일에 대한 적절한 비유는 키친 캐비닛이 아니라 한겨레신문이 최근 지적했듯 ‘가족기업’이다. 최순실은 남편, 박근혜는 아내라는 얘기다. ‘재산마저도 집단 운영해온 공동운명체’라고 하니, 구태여 부른다면 ‘키친 캐비닛의 대화’가 아니라 ‘베갯머리 송사’라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최씨네와 박근혜의 가족기업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박정희 유신체제 때는 박근혜는 구국선교단이라는..
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은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소양에 관한 얘기는 그가 정계 입문한 18년 내내 입방아에 올랐다. 박근혜는 늘 짧게 말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동생이 아니라면 아니다”. 간단명료하다.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였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선 정책 현안을 묻는 문재인의 질문에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선 ‘경제회생론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계속되자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예요”라고 했다. 본질인 정책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그간 보여준 행적과 언행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은 전무했다. “대통..
올가을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100만, 200만명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와 근 두 달 동안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프랑스 남쪽 님(Nimes)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를 외쳤던 신화를 떠올리게 하였으니, 만인의 입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2016년 12월9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어떻게 기록할까? 돌이켜보면, 4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는 좀 이상했다. TV토론에 나와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촛불에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은 과도한 권력욕 때문인가. 납득할 수 없다. 아무리 권력욕이 강해도 이토록 몰상식하고 몰염치하고 비양심적일 수는 없다. 분명 권력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 권력마저 수단으로 삼는 그 무언가가 비밀의 열쇠다.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는 3가지가 있다. 경제성장, 대북강경론, 그리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뭘 선택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박정희의 딸일 뿐 아니라 정치적 후계자다. 박정희가 아프면 대통령도 아프다. 대통령은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을 교육에서 구했다. 바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다. 고교 한국사 검토본을 보면 무려 9쪽에 걸쳐 박정희를 다루고 ..
교육부가 지난달 28일 공개를 강행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기초적인 사실 오류가 수백건에 달할 정도로 함량 미달의 부실 교과서인 것으로 드러났다. 뉴라이트 시각을 반영하며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편향성은 차치하더라도 엉터리 국정 역사교과서를 제작한 것이다.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놓고도 이준식 부총리는 “질 좋은 교과서”라고 했으니 교육수장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내년에 국정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한 서울·광주·전남 교육청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했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역사교육연대 등 역사학회가 그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오류가 한 쪽당 1.5건가량이..
현 대통령을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일컫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다. 여성을 위한 정책을 제안한 적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여성’을 단지 생물학적 범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한때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자가 무슨 정치!’라고 공공연히 훈계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물론 현 대통령이 선출된 데에 여성이라는 요소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라는 생물학적 금기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