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통찰을 빌리자면 도구적 존재로서의 사물은 역설적으로 도구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그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도구로서 망치가 정상 기능을 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망치로 내리치려는 못에 고정돼 있을 뿐이다. 망치가 부러져서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시선은 못에서 망가진 망치로 옮겨간다. 최근 압구정동 아파트 경비원 노동자의 분신사건을 보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통찰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입주민의 막말에 상처 받은 쉰 넘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도구적 존재로서 노동자가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노동을 멈추는 순간이다. 잔인하고 독해진 세상에서 뼈와 살과 영혼을 가진 인격체..
이기권 노동부 장관이 비정규직 고용제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2년 안에 실직하는 것보다 비정규직일지언정 오랫동안 근무하는 것이 낫지 않으냐는 발상이다. 노동부 장관으로서 열악한 처우와 저임금도 모자라 해고 위협에 떨어야 하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 개선을 숙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제도를 회피하려는 온갖 편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고용제한 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일까 싶다. 특히 재계가 유사한 주장을 한 뒤 이 장관의 발언이 나와 진정성 논란도 일고 있다. 비정규직보다는 경제살리기란 명목으로 재계의 노동비용절감과 고용유연성 목소리를 반영한 방침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당장 노동계로부터 비정규직만 양산하게 되는 땜질..
신문에서 독거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봤다. 서울 장안동의 다가구주택이었다. 주검을 수습할 이들에게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엔 “고맙다.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라. 개의치 말고”라 써 있었다. 빈곤의 바닥으로 또 하나의 목숨이 푹 꺼졌다. 그런데 ‘스스로 끊었다’는 말이 오랜 시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라니. 모순이지 않은가. 목숨은 스스로 끊는 게 아니다. 극단으로 몰린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송파 세 모녀도 집단으로 벼랑으로 몰린 예가 아니던가. ‘스스로’라는 말은 그저 남은 자들의 면피처럼 읽혔다. 이들의 죽음이 주목된 이유는 그들이 남긴 짧은 글이었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송파 세 모녀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가느다란 신..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에도 일부 부자들은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금리가 치솟으면서 이자 소득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손실이 소수에게는 이익이 되곤 한다.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파견 판결을 보면서 다시 ‘이대로’가 떠올랐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취임사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구조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서 어떻게 ‘국민 행복 시대’를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친기업 성향을 가진 정부의 경제 수장 발언으로는 이례적으로 비칠만도 하다. 하지만 정부가 어떤 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 하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지난달 울산공장을 제외한 비정..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소송에서 이겼다. 소송의 원고인 1100여명의 노동자들 모두 그동안의 근속을 인정받고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밀린 임금도 받아 마땅하다는 법적 타당성이 확인됐다. 소송만 4년, 불법파견에 맞서 싸워온 지 10년이다. 집회도 하고, 파업도 하고, 노숙 농성, 고공 농성, 단식 투쟁 등 안 해본 게 없다. 고민과 상처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긴 시간을 견뎌온 끝에 마침내 정규직 전환 요구가 법적 정당성을 확인받았으니 당사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일이다. 현대자동차뿐 아니라 수많은 사업장에서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파견에 제동이 걸리려나 기대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이번 판결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현대자동차가 법원의 판결을 수용하고 이..
작년에 영화 촬영장엘 갔었다. 보조 출연으로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출연이 있었기 때문인데, 촬영신 배경은 11월. 그런데 12월에 촬영을 하다보니 출연자들의 옷이 문제였다. 온통 점퍼 차림이라 계절과 맞지 않다는 얘기였다. 추운 날씨에 겉옷을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했다. 늦은 저녁 시작된 촬영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 영화는 곧 개봉된다. 11월에 어울리는 옷이 있겠지만 소위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가장 빨리 입고 가장 늦게 벗는다. 계절을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두 해도 아니니 계절과 무관하게 날씨 따라 산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게다. 그러니 영화에서 다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이 있다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그것이 일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