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시청역 1번 출구를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정동교회를 지난다. 그 길 끝에 경향신문이 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바닥을 수놓는 아름다운 출근길이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한 숙연함이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혼란스러웠던 구한말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길에는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있고, 아관파천의 무대였던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고, 을사늑약을 맺은 중명전이 있다. 또 유관순 열사 동상이 교정을 지키는 이화여고가 있다. 얼마 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하얀 천이 쳐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종황제의 국장을 재연한 것이라고 했다. 고작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에 왕이 있었고, 주권 잃은 왕의 타살 의혹에 민중들은 분노했다. 이 땅은 일제 치..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다. 솔직히 내가 3·1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국사책과 참고서에서 보았던 정보 이상은 아니어서 아무리 늘려 잡아도 몇 쪽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험대비용 연표 속에 넣어 외운 것들이라 납골당 유골처럼 가지런히 죽어 있다. 내게는 1894년의 청일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경술국치 하는 식으로 1919년의 3·1운동인 것이다. 인물들도 그렇다. 아이들이 단어장처럼 외워 부르는 ‘역사는 흐른다’의 노랫말처럼 “삼십삼인 손병희, 만세만세 류관순”일 뿐이다. 이런 내게 3·1운동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인상을 심어준 글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읽은 함석헌의 글 ‘고난의 의미’다. 글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을 녹취해 정리한 것이다. “제가 지내봤..
2015년 12월1일 중국 난징에 일본군 ‘위안부’ 전시관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이 개관했다. 중국에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의 ‘위안부’ 기념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의 결정적 증언이 있었다. 그녀는 2003년 11월 난징을 방문해 리지샹 2호 건물이 자신이 갇혀 있던 일본군 위안소 ‘긴스이루’라고 밝혔다. 평남 남포 출신의 박영심은 1938년 난징의 ‘긴스이루’로 끌려갔다. 하루 30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끔찍하고 무서워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3년 뒤에는 미얀마의 라시오에 위안소로, 다시 2년이 지나서는 중국 윈난성 쑹산 위안소로 옮겼다. 1944년 쑹산의 일본군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궤멸했다. ‘위안부’들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연합군은 쑹산의 승전보를 전하면서 위안부들..
이맘때면 시인을 생각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사랑을 쉽고 정제된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시인은 보편, 인도주의, 휴머니즘으로 호흡했습니다. 인류가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 윤동주 시인이 이 땅에 심은 자산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모두가 공감할 정서와 연민을 그의 말에 담았습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저항시인으로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윤동주 시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창씨개명이라는 민족정신에 대한 지독한 고문을 가하던 시기에, 우리의 언어로 세계 어디서나 보편타당한 인류애를 담은, 사랑을 담은 연민 어린 시를 이 땅의 누군가가 쓴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만의 시인이 아닌, 인류의 시인으로서 세계인의 보편 정서를 담은 ..
망우리공원에 갔다. 서울과 구리에 걸쳐 있는 망우리묘지가 공원으로 탈바꿈한 지는 꽤 됐다. 서울시와 내셔널트러스트 등이 역사인물을 발굴하고 인문학 길을 조성해 명소로 만들었다. 이제 망우산은 공동묘지가 아닌 나무가 울창한 생태 공원이다. 설 전날, 망우리묘지 인물 발굴기 (김영식 지음)를 길잡이 삼아 집을 나섰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명인사는 시인 김상용·박인환, 소설가 계용묵·최서해, 화가 이중섭·이인성, 가수 차중락, 독립지사 한용운·오세창 등 50명이 넘는다. 70여만평의 공원에 흩어져 있는 이들을 다 만나려면 족히 하루는 잡아야 한다. 이날은 독립운동가로 한정했다. 망우리공원 초입의 역사인물전시장에서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가면 ‘망우리 사잇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15분쯤 오르면 능선에서 도산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