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밀물 들면, 한강 하구의 여러 샛강에는 물이 역류합니다. 물만 불어나는 게 아니고 어느 날엔 안개도 스멀스멀 자유로를 성큼 건너뛰어 심학산 숲으로 진군합니다. 그제 아침에는 공중이 희붐하고 잔뜩 찌푸렸습니다. 는개인가요? 는개는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안개보다 조금 뚱뚱하고 비보다 조금 홀쭉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그 는개에 몸을 섞으며 둘레길을 걷다가 한 단어가 떠오르는 특별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미망인이라는 말. 하나하나 새기면 참 잔인하기도 합니다. 무슨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든가요. 더구나 여성에게만 쓰이는 말이라니요. 해서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다른 사람이 당사자를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
허위정보가 넘치고, 뉴스의 허울을 쓴 가짜뉴스가 판친다. 전통 언론은 팩트체크라는 형식으로 진위를 검증해 보여주지만 이미 퍼져나간 가짜와 허위의 위력을 잠재우지 못한다.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공권력도 가짜와의 싸움을 벌이지만 역부족이다. 최근 한강실종사망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있는 수사기관이 그러하다. 각종 음모론과 추측이 끊이지 않고 방구석 코난과 돈벌이 유튜버들이 쏟아내는 가짜뉴스와 허위정보에 대응하느라 경찰은 힘이 빠진다.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받은 경찰에 대한 불신이 초래한 사태이지만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급기야 허위사실 유포 행위를 수사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코로나19와 관련된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도 방역 당국을 힘들게 하고 있다. 전염병처럼 전파력이..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 멀리 큰 산에 가지 못하고 사무실 뒤 심학산에 올랐다. 어느새 짙은 녹음. 여러 잎사귀와 잎사귀들 사이로 기이한 모양의 새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호젓한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림자 사이로 찰랑찰랑 햇살은 심연의 물고기처럼 뛰어오른다. 그 둘레길의 한끝에 약천사가 있다. 지장보전 처마 끝에 딴 세상으로 가는 입구 같은 풍경(風磬). 그 옆의 글귀가 가슴을 때린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무엇에 묶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 문장을 만난 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수지가 맞았다. 이를 다만 아는 것을 넘어 저 뜻을 제대로 체득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따라 허공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루는 간단히 하루 만에 저문다. 자..
한라, 지리, 설악, 덕유 그리고 계방. 평창의 계방산은 남한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다. 오대산보다도 키가 크지만 제 이름을 주장하지 않고 오대산국립공원의 한 일원으로 자리하는 겸손한 산이기도 하다.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면 힘들기 그지없겠으나 산의 어깨쯤에 해당하는 운두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운두령, 그야말로 구름의 머리를 만지는 기분이다. 초입에서 가파른 몇 계단을 오르니 고산의 평원에 바로 도달한 듯 남다른 기운이 후끈하다. 후드득 피어난 꽃들도 자세와 씨알이 다른 산에 비해 굵다. 감질나게 한두 개가 아니라 무더기로 피어 있는 당개지치, 얼레지, 홀아비꽃대. 진달래는 색이 아주 선명하다. 저 아래에서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겠으나 여기에서는 전혀 새로운 계절 감각을 구가하는 중이다. 그중에서 눈길을 ..
극장에는 덜 가지만 영화는 더 보고 있다. 매달 얼마를 내면 수백편의 영화를 언제고 틀었다 끌 수 있으니까. 그래서 거실에서, 리모컨을 옆에 놓고, 시큰둥한 마음으로 본다. 이제 나는 한 편의 영화를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폭군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됐는데 나와 영화의 관계는 왜 점점 공허해지는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출판프로젝트로 기획된 단행본 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리모컨을 들고는 도저히 영화만의 ‘시간’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영화는 시간 체험인 것이다. 상영 시간을 끊지 않고 버텨 내며 끝을 보는 시간 체험이 내겐 영화다.”(김희정 감독)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나는 나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간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
진달래는 이미 다녀갔고 철쭉이 흐드러지게 위용을 떨치는 근황. 지리산 성삼재에서 반야봉,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서 슬쩍 직각으로 몸을 돌려 만복대로 간다. 지리의 장엄한 주능선에 하나 꿇릴 것 없는 길이 휘몰이장단처럼 오르고 내린다. 이윽고 초록의 물감에서 땀에 전 몸을 정령치의 아스팔트 도로로 빼내려는 순간, 휘발유 냄새가 훅 끼쳐오는 인공의 계단 한쪽에 곰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국립공원에서 마련한 저 친절한 그림 속의 곰은 곳곳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쓰여 있기를, “산에서 곰을 만나게 된다면! 갑자기 곰을 만났을 경우 침착한 행동으로 천천히 그 장소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계속 가까이 접근해 올 경우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소리를 질러 사람의 존재를..
저녁은 밤과 새벽을 거쳐 아침으로 연결된다. 그게 순서다. 4월 다음에는 당연히 5월이다. 요즘 역주행하는 노래들이 있다는데 여름의 입구에서 겨울로 거꾸로 달리는 날씨인가. 봉평에 일이 있어 갔다가 뜻밖의 눈 소식을 들었다.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대관령으로 달려 능경봉에 올랐다. 눈이 소복하게 거짓말처럼 쌓여 있었다. 눈도 나무도 사람도 이 예기치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천하의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 꽃들에게도 피는 차례가 있다. 최근 그 개화 순서가 많이 변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때를 맞추지 못한 불시화가 있는가 하면 꽃들이 일거에 피었다가 일시에 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대궐의 계단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기후변화의 한 전조가 이리도 생생하게 들이닥치는 ..
국정감사 때가 되면 증인으로 채택된 대기업 총수들은 줄줄이 해외 출장을 간다. 불출석에 대한 벌금형은 1000만원 정도밖에 안 되니 별 부담도 안 된다. 생중계되는 국정감사 현장에서 곤욕을 치르는 것보다 그 정도의 벌금은 내고야 말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서민들에게는 몇 달 치 월급이고 꽤 번다는 사람의 한 달 치 월급 정도이니 큰돈이지만 그들에게는 막말로 껌값이다. 현행 총액 벌금제가 갖는 맹점이다. 부자와 빈자의 1만원이 다르게 느껴질 텐데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벌금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과된다. 피고인의 재산 상태나 월 소득과 상관없다. 그래서 형식적·절대적 평등이지만 실질적·상대적 불평등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평균적 정의 관념에는 부합하지만 배분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같은 것은 같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