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시간이다. 대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었다. 너도나도 나서면서 여야의 잠룡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선 절차는 시작되었고 국민의힘은 8월에 경선 버스가 출발할 예정이다. 야권에서는 장외에 있는 후보들이 이 버스에 승차할지가 관심사다. 여당의 경선 일정은 예비경선 후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되었지만 어쨌든 여야 모두 경선 레이스가 진행 중이다. 야권에서는 민심을 탐방하는 후보도 있고, 입당으로 후보군에 합류한 이도 있다. 어디가 유리할지 저울질하는 후보도 있다. 여당은 후보 간 네거티브 공격이 격화되다 보니 원팀협약식을 연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엇보다도 임기 말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40%가 넘어서자 ‘문심’ 얻기 경쟁이 뜨겁고 적통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후보들의 행보는 중계방..
읽는 것이 직업인 비평가에게 아픈 것은 이런 질문이다. ‘타인의 말을, 잘 읽는 만큼 잘 들으시나요?’ 그러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다. ‘잘 듣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잘 읽어보려고 애쓰는지도 몰라요.’ 타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줌파 라히리의 초기 소설 중에 ‘질병 통역사’를 소재로 한 것이 있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일 때 환자의 증상을 의사에게 정확히 통역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감정과 고통의 전달 가능성이다. 의사와 환자가 같은 언어 사용자일 경우라도,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 대화 상황에서도,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싶다. 각자의 감정과 고통은 서로에게 외국어일 때가 많으니까. 이를테면 이런 것을 감정..
“대통령이 책임져라”, “장관 사퇴하라”, “국민 앞에 사죄하라”. 무슨 일이 터지면 흔히 들리는 목소리다. 야당이 즐겨 쓰는 공격무기다. 언론도 나서고 국민청원도 등장한다. 어떤 잘못에 대한 책임인지도 모르면서 장관이 경질되고, 최고 지휘라인이 사퇴하면 일단 진정된다. 연대책임을 묻고 문책성 인사로 사태를 마무리한다. 그렇다고 재발이 방지되나. 성범죄에 관한 한 전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군대 내 성범죄가 그렇다. 온갖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고 예방 교육도 강화했건만 잊을 만하면 또 터진다. 성범죄 피해 여군이 자살하는 비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몇 해 전에는 남성 장교로부터 준강간 당한 여군 장교가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군 성폭력 피해자가 자살로 내몰리지만, 국방부와 군 당국은 사건이 발..
거창에서 자라나 부산으로 나와서 문현동(門峴洞) 고개 너머 대연중 그리고 동래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대학 마친 뒤, 쫓기듯 사회로 진출해서 몇 개의 우회로를 거쳐 파주 심학산 아래에 정착한 게 한 줄로 요약한 그간의 내 이력이다. 그사이 뾰족한 시간들이 마구 들이닥쳐 서른의 급경사, 마흔의 깔딱고개, 오십의 반고비를 차례로 넘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는 단골집도 많아서 호프집 문지방을 닳도록 드나들던 어느 날의 회심 끝에 산으로 발길을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머리가 하얗게 번질 무렵, 노랗고 붉고 흰 꽃들에게 홀딱 넘어간 것은 더욱 잘한 일. 자연의 꽃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으로서의 꽃이 아니었다. 세상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꽃들, 그 안에 질서 있게 어울린 암술과 수술과 꽃가루. 관찰할..
목포 앞바다에 떡 버티고 있는 압해도(押海島). 우리 국토의 최첨단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을 실천하고 있는 호기로운 섬이다. 오래전, 한 해의 마무리 꽃산행을 압해도에서 했다. 바다 가운데로 풍덩풍덩 빠지는 기분으로 완만한 능선을 걸어가는데 뜻밖의 꽃이 눈길을 끌었다. 해풍에 몸을 맡기며 처연하게 피어난 건 진달래가 아닌가. 그때는 늦가을이라 꽃보다는 열매가 승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홀로 흔들리는 진달래의 꽃을 바라보자니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꽃은 올해의 지각생인가 내년의 전령사인가. 바로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상황은 간단히 정리되었다. 불시화로다! 올봄부터 계절이 뒤죽박죽되었다는 소식이 여러 곳에서 전해졌다. 개화 순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뒤바뀐 채 피어나기도 하고 한꺼번에 다투어 피기도 했..
무덤 없는 산도 없지만 쓰러진 나무 하나 없는 산도 없다. 앉은키가 따로 없는 나무는 서 있을 땐 그리 큰 줄을 몰랐다. 산이 은밀하게 키우던 꿈 하나가 무너졌는가. 쿵, 쓰러진 나무는 한 마을이 붕괴한 듯 그 규모가 엄청나고 죽어서도 이끼를 키우고 있다. 하늘로 고독하게 걸어간 자들의 최후는 나 따위가 감히 근처에도 얼씬 못할 세계다. ‘지구에는 골목길이 참 많다’(김행숙)지만 저 길은 결국 입안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든다. 목구멍에서 넘어온 소리를 공들여 어려운 말로 만들어야 하는 입안은 저 골목만큼이나 복잡하다. 모든 말이란 결국 세상으로 나가 삼시 세 끼 를 구하기 위한 방편인 것. 겨우 획득한 그 먹이를 최종 운반하는 젓가락의 집요한 공격에 처마 밑의 문패 떨어지듯 어느 날 신호가 온다, 흔들리..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세 개의 층위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죽음. 첫째, 나의 죽음. 이것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그러나 내가 소외되는 사건이다.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내 삶의 가장 치명적인 진실을 알게 하되 그에 응답할 시간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인생을 돌아본 이후에야 자신이 그동안 잘못 살아 왔다는 “끔찍한 진실”을 깨닫지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진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진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에 가까이 가되 죽지는 않고 진실만 챙겨오는 체험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다. 바로 앞에 철제빔이 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한 날 오후에 직..
산은 생각의 학교다. 네모난 방, 사각의 모니터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생각들이 찾아온다. 아침에 해와 동창생처럼 나란히 출발해서 태백산에 오른다. 천제단 앞에서 몰려오는 칼바람에 맞서 오래된 생각에 젖는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8폭 병풍처럼 첩첩이 도열하는 산들. 왜 산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가. 여러 고비를 넘기고도 아직 신통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그건 그냥 그래서 그렇다는 것으로 여기며 그 질문은 다음으로 넘긴다. 이윽고 온종일 헤매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와 헤어져 산을 빠져나온다. 하루 만의 졸업생인 양 되돌아서서 공손히 배꼽인사를 한다. 늦은 밤 책 하나를 펼쳤다. (열화당 발행).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산과 그 아래 턱 버티고 있는 산사나이들. 사진사가 사진에 나오지 않듯 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