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해지면 강해지는구나 꽃도 버리고 이파리도 버리고 열매도 버리고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벌거숭이로 꽃눈과 잎눈을 꼭 다물면 바람이 날씬한 가지 사이를 그냥 지나가는구나 눈이 이불이어서 남은 바람도 막아 주는구나 머리는 땅에 처박고 다리는 하늘로 치켜들고 동상에 걸린 채로 햇살을 고드름으로 만드는 저 확고부동하고 단순한 명상의 자세 앞에 겨울도 마침내 주눅이 들어 겨울도 마침내 희망이구나 - 차창룡(1966~ ) 고행은 육체의 고통을 견뎌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수행이다. 몸을 괴롭게 하여 마음에 매달린 온갖 애착과 욕망을 끊어버리는 수행이다. 시인은 그 수행의 본보기를 겨울나무에게서 본다. 톱질 몇 번이면 쉽게 넘어가는 나무. 한 발짝도 움직일 줄 모르는 나무. 땔감이 되든 의자가 되든 사람이..
특별하게 잘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부족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날들을 배고픔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각종 일로 온몸 성한 곳이 없는데 이상하다 물만 먹어도 살이 오른다 밥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비굴하게 밥을 번 적은 없다 북한 어린이 돕기 성금보다 술값을 더 지출한 게 사실이지만 큰맘 먹고 하는 외식도 고작해야 자장면이고 특별히 탕수육을 곁들인 날은 밤새 설사로 고생했다 굶은 기억이 살찌게 하나 슬픔이 배부르게 하나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얼마나 허겁지겁 살아냈는지 잊는다는 것이 병을 주었나 참는 것이 밥이었고 견디는 일이 국이었고 울며 걷던 길은 반찬으로 보였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면 부황과 간경화로 먼저 간 식구들이 떠오른다 저, 좁은 땅 다 파먹고 말없이 누워있는 슬픈 무덤 덩..
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방목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 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 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
지하도 걷다가 어느 화원 앞이었다 화원이라는 말이 오랜만이어서 걸음이 느슨해지고 잘생긴 나무화분 있어 멈추었다 희박해지는 공기 탓이었나 금방이라도 모든 죄를 고백할 듯 창백하구나, 사람들 그 나무 이름이 인도 벵갈고무나무였지 그때 한 검은 사내가 나무 앞에 우뚝 선다 나는 조금 떨어져 서 있었기에 그에게 충분한 자리를 내줄 수 있었다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넓은 나무 이파리를 만지고 만지더니 가던 길을 간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그도 나무도 와도 너무 와버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 사내의 몸에서 풍겼던 냄새 뭉치로 나무는 잠시 축축하다 (…) -이병률(1967~) 우리나라에 와서도 벵갈고무나무는 인도의 공기와 침묵을 주위..
태양이 맨질한 마당에 그림자를 널어놓는다 빛바랜 칫솔을 물고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린다 거품을 문 입술은 지느러미보다 유연하다 칫솔이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소맷자락의 꽃들이 간들거린다 노파와 칫솔이 만드는 각도에 맞춰 마당 안의 사물들이 일제히 몸을 흔든다 마른 손등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담 밑의 꽃봉오리가 조금씩 입을 벌린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그림자를 발끝에 달고 아이들이 달려나간다 양은대야 가득 경쾌하게 구름이 흘러간다 오래전 지붕 위로 던진 치아들이 뭉게뭉게 떠 간다 -한세정(1978~) 마당 구석에 있던 변소가 집 안으로 들어온 걸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우유가 종이 안에 담겨 있는 걸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마당도 담장도 길도 산도 구름도 모두 실내에 있는 게 당연하게..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비좁은 장롱 속에 들어가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다 이불 밑에 납작하게 누워 있어도 피아노의자 아래 네 발로 기어들어가 새끼 고슴도치로 웅크려 있어도 금세 웃음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발코니 구석에서 은빛 물방울이 되고 유리창에 달라붙은 햇빛이 되고 발가락까지 오그린 투명한 숨소리가 되는 아이들 그렇게 아무리 숨어 있어도 가면을 몇 개씩 찾아 쓰고 있어도 얘들아 이 집에서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단다 물풀 같은 하얀 종아리가 다 자라고 나면 굳이 숨으려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너희들을 사라지게 할 거야 보이지 않게 만들 거야 다른 그 무엇이 될 수 없게 서류 속에 집어넣을 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은 그림을 그려야지 유령과 싸워야지 커튼 뒤에서 장롱 속에서 - 김..
오늘은 귀로 국수를 먹습니다 바람국수를요 바람이 키운 아이가 국수를 말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혔네요 누군가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를 먹습니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서 그 허기가 말도 못하여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습니다 불치의 국수를 집 없는 국수를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를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를 - 조길성(1961~) 허기가 수십 년간 익을 대로 익어 국수가 되었네요. 바람결에서 국숫발을 뽑아 만든 국수. 먹지 않아도 후루룩후루룩 맛있는 소리가 나는 국수. 울음이 ..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 이하석(1948~ ) 나뭇잎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 무늬를 온몸으로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