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중이었다. 그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한마디도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전화였던 터라 자동차를 갓길에 세웠다. “네, 네. 그렇군요.” 안경을 쓴 채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주판알을 튀기고 있을 것 같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내 신용등급과 이런저런 부채 내용을 읊었고 나는 그 내용을 야단 맞는 학생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외국에서 송금되는 고정적인 수입이 저희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심사 과정에서 별 문제가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은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중요한 과정이 하나 남았는데, 혹시 지금 받아 적으실 수 있나요?” 나는 얼른 종이와 펜을 꺼내어 남자가 불러 주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채·무·변·제·능·력·검·증’ 또박또박 적었다. 자신을 ○○은행 스마..
사십대 남성이 돌연사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이 나라에서 ‘중년 남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왠지 울적하다.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약육강식의 원리로 쉴새없이 찍어누르는 사회 속에서 알맞게 구겨지고 비굴해진 남자의 씁쓸한 모습. 하지만 그 살찌고 망가진 육체 안에 여전히 풋풋한 ‘소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슬퍼진다. 앗, 그런데 그런 그들이 최근 느닷없이 출판계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오십대가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진 남성들이 여성보다 소설이나 시집 같은 문학책을 더 많이 읽는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문학 중년’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니…. 매우 센티멘털하게 느껴지는 굿 뉴스여서 오랜 만에 가슴까지 설렜다. 심지어 혼자 신이 났다. 중년 남자들에게..
울 엄마 나이, 올해 71세다. 그런데 얼마 전 하시는 말씀이 찬란하게 놀라웠다. ‘지금 인생에서 절정의 행복을 느낀다’는…. 엄마의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다. 가난한 농촌 출신의 젊은 부부는 삶이, 무엇보다 자식들의 삶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남편은 뿌리 뽑힌 수목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방황하다가 먼저 서둘러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막내딸이 아홉 살 되던 해였다. 그 이후 젊은 부안댁은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 남편도 없이 도시에서 세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건 온갖 설움과 수모, 육체적 고통을 수족인 듯 달고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얼마나 악착스럽게 살았던지 남자 몫의 일당을 받기 위해서 벽돌 70장 얹은 지게도 졌다는 게 이제 와 무용담처럼 들..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에로 연애소설’ 3부작 에 대해서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일반의 성도덕과 삐딱하게 대립하는 이 작품은 서로 속박하고 학대당하는 가운데 쾌감을 느끼는, ‘BDSM’이라는 은밀하고 괴이한 성생활을 중심으로 한 어느 남녀의 연애 이야기다. ‘BDSM(구속과 순종,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이라는 단어가 낯설다면 그냥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 ‘SM’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순결한 여대생이 돈 많은 부자 청년과 노예 계약을 맺고 결박당한 채 매를 맞으면서 쾌락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며 자아정체성을 찾는다는 이 소설이 시리즈와 비슷한 속도로 많이 팔려서 영어권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이해가..
아마 누구나 그럴 거라 믿는다. 요즘은 뭘 하든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에 잠긴 아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 일을 하다가 문득문득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한다. 슬퍼하고 분노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욕이나 하며 넋 놓고 앉아 있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정말이지 뭐라도 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이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또 어떤 이는 목숨 걸고 청와대 게시판에 실명으로 ‘이런 대통령 필요 없다’는 글을 올렸다. 5월11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에는 세월호 비극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무능력과 부패를 고발하는 전면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미국에 사는 교포 여성들이 ‘미시USA’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서 기획하고 4000여명이 함께 돈까지 모아..
옛날 옛적에, 그러니까 19세기 초반 프랑스에 나이 든 여자들만 골라 사랑하는 드메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지만 사회적 관습에 부딪혀 언제나 보답받지 못했다. 어느날 청년이 천재적인 지성과 마성에 가까운 매력으로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쇼팽의 연상의 여인으로 유명한 그녀의 별명은 ‘쇼팽을 말려 죽인 늙은 암여우’였다)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사랑이 어디에 있기에 나에게 이토록 멀기만 한 겁니까?” 그녀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무심하게 “혹시 우물 속에 있을지 모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드메는 사랑을 찾기 위해 당장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드메라는 청년은 금지된 사랑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던졌고, 사..
언젠가 이명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메시지를 원한다면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라.” 그 말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메시지보다 우선하는 건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자기만의 양식과 관점, 태도. 그게 스타일(Style)이다. 그리고 훌륭한 감독은 저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이명세의 영화는 감독 타이틀을 지운다 해도 영화적 스타일만 보고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 눈 밝은 관객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과 의 감독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아무리 눈 밝은 독자라도 그 감독을 가려낼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외국 자본(특히 할리우드)이 끼어들면 감독 저마다 스타일이 조금 옅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런 면에서..
안현수의 금메달 소식을 듣고 갑자기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원래 불현듯 떠오르는 충동대로 움직이는 매우 경박한 성격의 인간인지라 단박에 목표물을 찾아 돌진한다. ‘BBC Legends’ 시리즈로 나온 앨범. 한때 정말 마르고 닳도록 듣던 앨범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과 4번, 드뷔시의 이미지 중 ‘Hommage a Rameau’,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등 총 5곡의 피아노 솔로 연주곡이 실린 앨범인데 그중에서 한 곡을 골라 내 멋대로 빅토르 안에게 바칠 셈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냐고? 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 태생이다.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결점의 완벽주의를 지향했던 천재 피아니스트다. 천재라는 표현에 그 누구도 딴죽을 걸 수 없었던 것이 그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