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아파트먼트(L’appartement)라는 이름의 디자인 숍 앞을 지나가는 중이었고 그 쇼윈도에 눈길을 끄는 의자 두 개가 전시돼 있어 걸음을 멈추고 멍청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둘 다 제법 귀티가 나는 낡은 나무 의자인데 한 녀석은 방금 외과의사에게 다리 수술을 받은 듯 네온 그린 컬러의 플라스틱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녀석은 고장 난 엉덩이를 갈아치운 듯 역시 같은 소재의 새로운 엉덩이 받침대를 달고 있었다. 나는 형광색 플라스틱 보철물을 달고 있는 낡은 나무 의자가 뿜어내는 독특한 아우라에 이끌려 숍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다리에 붙은 꼬리표를 살펴보니 ‘5.5 designer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프랑스의 젊은 디자이너 그룹이 만..
리턴 턴테이블이라고 할까? 아님 LP의 부활? 여하튼 LP 레코드와 턴테이블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 ‘뉴욕타임스’조차 관련 기사를 낸 걸 보면 그게 전 세계적인 분위기인 듯. 국내에서는 정확히 아이유를 시작으로 에피톤프로젝트, 김동률, 버스커버스커, 인피니트, 혁오, 브라운아이드소울과 나얼 등 젊은 가수들이 제작한 한정판 LP 앨범이 발매되자 10대들까지 LP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고가의 턴테이블 대신 LP 음악을 MP3 파일로 변환하는 기능까지 갖춘 휴대용 LP 플레이어 시장이 커졌고, 홍대와 강남, 이태원 등지의 LP바를 찾는 이들도 요즘 부쩍 많아졌다. 그 때문이겠지만 참 발 빠르다. 지난 5월 이태원에 뮤직라이브러리를 개관한 현대카드 말이다. 록, 재즈 등 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중 서울을 빠져나간 인구는 101만2000여명. 그 중 22만9010명이 경기와 인천으로 이동했고 그 나머지는 더 멀리 강원도나 충청도(특히 원주와 충주. 제2영동고속도로와 중부내륙철도로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 시간 안으로 개선될 예정인 도시), 혹은 경상도나 전라도 등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덕분에 지방의 전원주택을 찾는 인구가 급증한 가운데 부동산 중개인들이 팔고 싶어도 팔 집이 없어서 ‘매물 찾아 삼만리’에 나섰다. 그 때문인지 택배 아저씨들이 ‘오지’라고 꺼리는 이 산동네까지 와서 굳이 명함을 주고 가는 업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집 안 파세요?” “안 판다고 했잖아요. 지난해에도, 올봄에도 물으셨고 그때마다 안 판다고 했는데 굳이 다시 와서 묻는 이유가 있나요?” 따지..
인터넷 뉴스 페이지를 열면 우울한 얘기투성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삼킨 28살 청년 노동자 이야기며, 부자 동네 강남이 세금은 제일 안 낸다는 통계, ‘오류투성이 국정 교과서’ 소식. 거기에 홈플러스 인수전에 뛰어들어 논란이 된 국민연금이 지난해 가장 많이 투자한 주식 종목은 삼성전자라는 뉴스까지 읽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가운데 순식간에 화가 솟구친다. 심지어 220억원을 들여 만든 (민족문화사전)에 친일부역자들이 독립운동가들로 둔갑해 있더라는 소식까지 더해지니 금방이라도 마음에 몹쓸 병이 날 것 같다. 그래, 그렇지. 그게 바로 ‘11년째 내내 자살률 1위’를 지킬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는 거지, 하며 남의 얘기인 듯 냉소하게 된다. 하지만 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보다..
7년 전 일이다. 한 항공사 상무가 신인류로 떠오른 젯셋(jet-set)족에 대해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2~3년 전만 해도 ‘여행=여름휴가’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1년 내내 여행 중입니다. 둘 중 하나인 겁니다. 여행하고 있거나 여행 준비를 하고 있거나.” 그때만 해도 나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젯셋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1950년대 말 제트 비행기가 출현했을 때, 이걸 타고서 세계 각국을 유람 다니던 부유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년 내내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으로서의 젯셋족으로. 여하튼 그때만 해도 누구나 젯셋족을 꿈꿀 수 있었고 세상은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종종 젯셋족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은 기사가 잡지나 ..
7년 전 일이다. 아파트 임대료조차 내기 힘들었던 30대 남자가 자기 집 아파트 거실에 에어베드 3개를 깔고 숙박객들에게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민박사업을 시작했다. 그 수입이 제법 쏠쏠했던 모양이다. 마음 맞는 파트너들과 함께 아예 회사를 차렸다. 숙박업에 공유경제를 결합시킨 회사 에어비앤비. 2008년 창업 초기에는 1억5000만원이 없어서 7번이나 투자 유치에 실패했던 회사가 지금은 투자자들로부터 무려 200억달러(약 22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 공룡 기업으로 성장했다. 메리어트와 하얏트를 제치고 1위인 힐튼을 위협하는 공룡. 하기사 시골에 사는 나 같은 여자도 여행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면 에어비앤비에 들어가 개인 숙박 시설부터 찾아보게 됐다. 호텔과 달리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민박집..
예전에 ‘나도 샌프란시스코 시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름 내내 일요일 오후면 ‘스턴그로브 음악 축제’에 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시민 말이다. 그들처럼 초여름 저녁 나무 그늘 풀밭에 모포를 깔고 싶었다. 파란 하늘 아래 비스듬히 누워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바흐나 모차르트, 혹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듣는 거다. 100여년 전에 심어진 유칼립투스와 레드우드가 빽빽이 들어선 숲속 한복판에서 울려퍼지는 천상의 소리들. 그러나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는…. 손에 맥주나 와인이 들려 있다면 더 좋겠지? 음악을 들으며 아예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모포보다는 텐트가 낫지 않나?… 해봐야 소용없지만 그냥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한여름 밤의 음악 축제. 아, 그런데 이게 무슨 행운이란 말..
매일 매일 ‘메르스’ 뉴스만 보고 듣고 사는 와중에 얼마 전 눈에 띄는 전혀 다른 뉴스가 있었다. ‘집 짓고 나면 10년 늙는다, 왜 그럴까?’라는 제목의 오마이뉴스 기사였다. 횟수로 3년째 집을 짓고 있는 와중이라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클릭해서 읽어봤다. 공감을 원했건만 공감은커녕 코웃음이 나오는 가운데 약간 비위마저 상하게 하는 뻔한 기사였다. 요는 ‘10년 늙기 싫으면 설계비 아까워하지 말고 설계는 설계자에게 맡기고, 시공도 직접 한다고 까불지 말고 전문 시공팀에 맡겨라, 그리고 맡겼으면 그들을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 뭔가 냄새 난다 싶어서 살펴보니 역시나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대표가 쓴 글이었다. 그나마 이런 댓글이 있어서 속이 후련했다. “건축주가 짜증 나는 요소는 위의 다섯 가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