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명의 청소년에게 진로강의를 했다. 나와 내 일터를 소개하고 강의를 했다. 세상을 알아가고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 진로를 찾는 길이라는 요지였다. 질문에 답한 후 마무리 말을 했는데 질문자가 또 있었다. 담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역문화재단은 뭐하는 데예요?” 순간 눈앞이 노래지면서 대답이라고 한 설명은 내 귀에도 “웱케쫘앆껴귀 꼮껴서꽛흐으”같이 들렸다. 말을 마칠 땐 “지금 뭔소리?” 안 하고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질문은 계속 따라다니며 물었다. 그런 대답 말고 진짜 응답을 해보라고. 돌아볼수록 그 청소년에게 미안해서 이 글을 쓴다. ‘살인적 노동시간’보다 긴 공부시간을 견뎌 대학에 가면 진로를 잃어버린 채 비정규직을 전전할 확률이 더 많은 청..
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10대 엄마는 남몰래 사내아이를 낳았다. 보모의 손을 전전한 아이는 2세에 양부모를 만났지만 관심을 받진 못했다. 외할머니가 8세까지 키우고 돌아가신 뒤 다시 양부모 손에 맡겨진 아이는 언제나 혼자였으나 외할머니의 독서와 양부모의 교양 덕에 영특한 소년으로 컸다. 초등학교만 나온 소년은 영화광이 됐고 15세에 영화클럽을 설립했다 망했다. 이때 진 빚을 갚으려고 양부의 타자기를 훔쳤고 양부의 신고로 수감됐다. 이후 짝사랑에 치이고 입대했으나 탈영했고 수감됐다. 불우하기 짝이 없는 이 청소년을 제자이자 양자처럼 보듬은 사람은 영화계 리더인 28세의 멘토였다. 멘토의 보증으로 풀려난 그는 돌봄과 후원으로 성장했다. 23세가 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란 비..
요즘 나라 경제와 정치를 비롯해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어처구니없다”가 대세인 것 같다. 이 말은 작년 하반기에 특히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의 대사 “어이가 없네” 때문이다. 영화에선 ‘어이’를 맷돌 손잡이로 설명하면서 ‘갑자기 손잡이가 빠져 맷돌을 못 돌리니… 황당하다’로 풀이했는데, 한편에선 ‘어처구니’라고 해야 옳다는 논란이 있었다. 하나 이는 기와지붕의 토우(土偶)다, 맷돌 위아래를 연결하는 암수 쇠붙이다 등 ‘어처구니’의 어원에 대한 민간의 여러 속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전 정의로는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 기계, 물건’이란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다’와 붙어서 어떤 연유로 “어이없다”는 뜻으로 사용됐는지는 모호하다. 아무튼 충격, ..
작년 12월12일 토요일이었다. 인천 연수경찰서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1시4분이었다. “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맨발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인천 연수동에 위치한 동네슈퍼 주인의 제보였다. 경찰이 발견한 “아이”는 키 120㎝와 몸무게 16㎏,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에 맨발의 왜소한 소녀였다. 경찰 발표와 취재 보도가 잇따랐다. 2년간 집에 감금되어 굶주림과 폭행에 시달린 소녀는 뒤로 묶인 양손의 노끈을 풀고 2층 세탁실 창문을 나와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했으며 배가 고파 동네슈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맨발의 소녀가 등장하는 동네슈퍼의 CCTV 화면은 공포 영화였다. 넋 나간 소녀는 곧장 먹을 것을 찾아 가슴에 안고는 위태롭게 걸었다. 주인이 바닥..
보이긴 해도 만지거나 잡을 수 없는 것이 그림자다. 느낌이 들긴 해도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이 유령이다. 그림자와 유령이 배회하는 세계에서는 정체불명과 실체 없음의 풍문이 지배한다. 불과 두 해 전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을 똑똑히 보았지만 그 원인과 책임은 그림자처럼 잡을 수 없었다. 한 해 전이었다. 메르스의 공포에 지독히 떨었지만 그 경로와 전모는 유령처럼 볼 수 없었다. 이렇듯 우리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상현실의 수상한 세월을 살고 있다. 두 달 열흘 남긴 선거가 그렇다. 교과서, 위안부, 핵, 사드, 누리과정, 청년수당 등 역사의 기억과 공동체의 안전 그리고 삶의 수준은 한없이 누추해졌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운명과 우리 아이의 미래를 밝혀야 할 선거는 “그..
“여섯 살 때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한 이가 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른 직업을 찾아 “비행기 조종”과 “지리”를 배웠고, 세계를 날아다녔으나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살아오던 끝”에 사건을 겪었다. “여섯 해 전”의 비행 중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것이다. 그곳에서 열흘을 보낸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풍경”을 그렸다. “어린 왕자가 이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림. 어린 왕자는 여섯 개 별을 거쳐 지구별에 당도해 꼬박 한 해를 여행했다. 그 마지막 열흘간 둘은 친구가 됐다. 황현산 선생의 번역으로 생텍쥐페리의 를 접한 게 근 25년 만이다. 처음 읽었을 때나 지금이나 민망한 궁금증은 같다. 어린 왕자와 비행사는 몇 살일까? “삶을 이해하고 있”다면 “..
여기 대담한 청년들이 있다. 단체 시흥청년아티스트를 만든 청년 10인이다. 김광수 대표(23)를 비롯한 이들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 소셜 아티스트’라는 미션을 걸고 작년 11월 출범했다. 청년 10인은 지구 살리기 거리캠페인, 가로수길 모니터링, 세월호를 기억하는 벚꽃길 축제 등의 주민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또래 청년의 고민과 활동욕구(237명)를 조사하고 대학생 아르바이트 혁신 워크숍(130명)을 진행하며 청년정책을 구상했다. 그러더니 올 8월 청년기본조례안을 만들어 시흥시에 냈다. 이후 마트, 등산로, 행사장에서 주민과 일대일로 소통하며 주민청구 서명을 받은 기간이 약 3개월이다. ‘우리 청년의 문제는 우리가 풀 테니 도와 달라’는 진솔한 행동은 동네 어른들의 신뢰와 지지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