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소란한 시위 현장의 붉은 머리띠가 위악이면 엄숙한 법정의 검은 법복은 위선이다. 약한 동물은 비명을 지르고 맹수는 소리 없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이다. 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신영복 선생은 신간 (돌베개)의 15강 ‘위악과 위선’ 편에서 말했다. 6월2일 종영된 SBS 월화드라마 는 그 위선과 위악의 인간상과 사회상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함께 보여준 명작이었다.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PD가 선뵌 이 드라마는 ‘있는..
먼저 태어났다고 선생(先生)이라면 나 또한 수없이 선생 노릇을 했다. 그런데 선생 노릇이란 대체 뭔가. 그것은 뭐든지 가르치려고 드는 고약한 성미다. 이런 직성은 나이 든 내가 어린 사람보다 낫다는 고정관념과 높여 부르는 말대접에 절어 있는 정신 상태에서 비롯된다. 성실히 경청하는 자세와 모르면 모른다며 어린 사람에게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박멸해야 가능한 처신이다. 그러니까 선생 노릇은 너라는 존재는 무시하고 너의 입이 반응하는 호칭과 어감에만 촉각을 곤두세워서 ‘너를 위해 너를 바로잡겠다’는 구실을 일삼을 때 완성된다. 이런 선생 노릇은 가정, 학교, 일터, 사회 곳곳에서 여러 가면을 쓰지만 몹쓸 결론에선 같다. 자녀, 학생, 직원, 후배 등 나이와 지위가 낮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먹고산다’가 ‘같이 산다’와 하나라는 실감은 밥상에서 나온다. 혼자 먹는 밥상이라도 자연과 농부부터 여러 손길 탄 공동 살림이다. 밥상 앞에서 끼니마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되는 방도와 교양을 체득하는 연유다. 밥상의 감각과 감성이 ‘우리’라는 관계의 실체임을 상기하려고 ‘밥상머리 교육’이나 ‘밥상 공동체’라는 말도 있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는 선조들의 세계관도 밥상에서 터득한 것이다. 공동체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살이는 이처럼 밥상에서 비롯되고 밥상에서 거듭난다. 그 밥상에는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진저리나는 밥”의 고역이 차려진다. (2003)에서 김훈이 “꾸역꾸역 밥을 벌자”고 썼을 때 방점은 ‘벌이’보다는 ‘밥’을 입으로 “꾸역꾸역” 넣는 동작을 ..
배삼식 극작, 손진책 연출의 은 30년 삶이 깃든 한옥 철거가 임박해 정든 사람과 물건들을 떠나보내고 떠나가는 노부부 장오와 이순의 이야기다. 2011년 3월 초연된 이 작품은 올해 3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신구와 손숙씨의 연기와 더불어 상실의 기억들로 가득한 황혼이 얼마나 깊은 울림을 남겨주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진 것을 다 내주고 떠나는 장오의 뒷모습은 소멸해가는 것이 실은 새로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소책자에 이렇게 소개된 팔순의 장오는 혼잣말처럼 우리에게 건넨다. “사람 백정은 떵떵거리면서 산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은 고생한다. 죄지은 놈이 죄 갚음 당하지 않는다.” 극중 ‘3월의 눈’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행방불명된 노부부의 아들이 노모가 미끄러질까봐 새벽 집 마당에..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는 KBS 프로그램 의 한 코너 부제였다. 2009년부터 방영돼 2013년 종영하며 97가지 미션을 선보였다. 독일 일간지 기자 셋이 쓰고 2011년 번역 출간된 (지상사)은 ‘남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부제로 달았다. 책에는 111가지가 나온다. 출판사 서평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때로는 본드처럼, 때로는 맥가이버처럼, 때로는 베컴처럼, 때로는 쾌걸 조로처럼, 때로는 로빈 후드처럼, 때로는 이소룡처럼 변신할 수 있는 남자가 진정 멋진 남자”라고. 이들 6명 남자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하는 남자라니. 111가지를 알거나 101가지를 해서 ‘남자의 자격’을 갖추자니 부질없어 보인다면 다음 두 가지를 확실히 잘하는 남자에 대해선 한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육아를..
노래 ‘잘살아보세’는 1962년에 나왔다.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이다. ‘군사혁명’을 기념한 5·16 예술제에 선뵌 뒤 시시때때로 울려퍼진 이 노래를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이들이 현재 50대 이상이다. 1절은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을 만들자며 “잘살아보세”를 선창하고 후창한다. 2절 후렴구는 “일을 해보세”로 “태양 너머에 잘사는 나라”를 따라잡기 위해서다. 3절은 “뒤질까보냐” “세계를 향해” 내달리자고 하고 후렴구는 “뛰어가보세”다. “잘살아보세”는 목표이자 윤리, “일을 해보세”는 지상 과제, “뛰어가보세”는 행동강령으로 읽힌다. 이란 글이 한국선진화포럼의 ‘선진화포커스’에 실린 건 재작년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3000달러, 무역액 1조달러, 세계 7위의 수출대국이라는 금자탑”은 잘..
중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의 진로는 세 가지다. 자사고나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가는 유형.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에 가서 취업 후 퇴사하고 대입을 준비하는 유형. 그 사이엔 대다수의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이 있다. 이들 청소년은 일반고에 가며 널브러짐과 방황을 반복하다 나이를 먹는다. ‘문화과학’ 2014년 겨울호에 실린 강정식(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의 분류다. 첫째는 1%의 1%가 되려는 ‘자기경영적 주체’고, 둘째는 경쟁 탈락을 걱정하는 ‘불안정노동 주체’다. 글쓴이는 이 중 셋째 유형의 청소년들을 염려한다. “이도 저도 아닌” 청소년들은 20대를 어찌 보낼까. 대학엔 가지만 졸업유예생과 취업준비자로 지내다 훌쩍 30대의 모태 솔로가 된다. 공무원과 정사원의 동아줄을 잡지 못한 그들 중 다수는 “..
갓 젖을 뗀 아이가 참 영특해 보였다. 잘만 키우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지 모른다는 설렘이 가시질 않았다. 아이 앞날을 생각하면 사소한 선택도 까다로워졌다. 부모는 고심 끝에 ‘아인슈타인 우유’를 골랐다. 한 해 지나자 욕심이다 싶어 ‘파스퇴르 우유’로 낮췄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부모의 하향 조정은 계속됐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서울우유’로 다시 한 단계 내려갔던 시간이 지나자 ‘연세우유’와 ‘건국우유’를 거쳐 ‘삼육우유’에 이르기까지 쏜살같았다. 그래도 서울권이니 상당한 눈높이였다. 다음에는 저쪽 지방대엔 가겠지 하며 ‘저지방 우유’였다. 다음에는 3년제든 4년제든 대학에만 가라고 ‘3.4 우유’였다. 이 기대마저 접었을 때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부모는 동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