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말하는 ‘인간등급표’를 보면 부모의 자산과 소득에 따라 자녀 등급이 분류된다. 자산 20억원과 연소득 2억원 윗선은 ‘금수저’, 자산 5억원과 연소득 5500만원 아래는 ‘흙수저’ 등급이다. ‘은수저’와 ‘동수저’는 그 사이다. 이렇게 화폐 단위와 수저 등급을 연결시킨 현실 감각은 금, 은, 동, 흙의 재료 차이만 가리키지 않는다. 그 수저로 떠먹는 생활세계에서 뚜렷한 재질적 격차를 실감한다는 뜻일 게다. 진학, 취업, 결혼, 출산, 여가, 노후 등 생애 전반의 격차에 대해 일본 고베에서 창의적인 공동체를 운영하는 우치다 타츠루는 이렇게 통찰했다.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뤄진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이익은 주로 자기결정을 포기한..
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서 딱히 자각 증세가 없을 만큼 우리 일상에 녹아든 생활 감정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습니다”는 선행교육 사설학원의 흔한 광고 문구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다는 이 공황 상태는 부모에게 정상이다. ‘MADE WITH 100% PASSION’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유니폼 등짝에 큼직하니 박힌 서비스 강령이다. 99%도 모자라 100%의 완전한 열정을 요구받는 시급 5580원의 알바에게 몰염치한 이 무례는 왕이 된 소비자에게 상식이다. 어느 대기업 그룹의 홍보 제목은 단 한 줄 “바다는 쉬는 법이 없다”는 문장이다. 쉼 자체가 부정되는 이 극한의 과로 예찬은 정규직을 갈망하는 취준생의 소망이자 생존이 목적인 월급쟁이의 기본이다. 빠른들 더 빨..
도시 혁신의 선구자 찰스 랜드리는 10월 초 서울의 한 포럼에서 이렇게 발표를 마무리했다. “기술은 비약적 발전을 이뤄왔다. 그러나 우리의 대의민주주의, 조직과 관리의 형태는 대체로 수백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의 참여가 위축된 이유다. 시민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규정과 장려책을 보완해 공무원들이 최선을 다하게 함으로써 시민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여기엔 새로운 형식의 행정이 요구된다.” 객석에서 물었다. “새로운 형식의 행정”이 뭐냐고. 그는 “창의적 관료제”라고 말했다. 재차 질문이 나왔다. 그게 뭐냐고. 그는 답했다. “안됩니다. 왜냐하면~”이 아니라 “해봅시다. 그러자면~”이라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운동 시절에 이런 탄식을 한 바 있다. ‘새로운 것을 해보자 하면 공무..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했던 대학가에 ‘환락의 거리’가 밀려온 때는 1990년대이다. 이 무렵부터 동네 선술집이 사라지고 록카페와 록호프가 들어서면서 ‘대학가인지 유흥가인지’ 같은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서점과 복사가게, 당구장과 다방, 빵집과 분식집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때다. 경제 호황과 민주화의 축배를 동시에 치켜들던 시절이다. 2000년대에 신촌거리, 참살이길, 녹두거리 등 대학가는 커피전문점, 통신기기 판매점, 패스트푸드점, 화장품 매장 등 기업의 각종 브랜드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캠퍼스는 아예 기업명을 붙이며 대형화되고 기업 브랜드의 별별 편의시설이 캠퍼스를 점령한다. 덩달아 대학가 주변은 주상복합 쇼핑몰 같은 대형 개발붐이 뒤덮는다. 이로써 ‘환락의 거리’는 ‘기업의 거리’로 완성된다. 하여..
영화 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는 국민이 되길 원했다. 타지에서 테러리스트로 쫓기며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는 자주적인 국가 만들기를 원했다. 친일파는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의 국가 만들기를 택했다. 훗날 대한민국 국민이 된 우리는 풍비박산 난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게 빚진 후손이다. 하지만 66년 전 중단된 반민족행위 처벌과 18년 전 폐지된 국정 역사교과서의 부활을 둘러싼 다툼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도 난민 정체성으로 허우적대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립운동과 친일의 난민은 국가 만들기를 놓고 광복 70년인 오늘도 투쟁 중이다. 영화 의 마지막 장면에 집단 등장한 그들은 시민이었다. 재벌 3세와 국가 경찰의 싸움 현장을 에워싸고 일제히 사진을 찍는 그들은 28년 전 ‘독재 타도’를 외친 그들과 13년..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 수많은 아이들이 매일같이 오가며 아픔과 슬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4월14일 새누리당 박준 경남도의원이 한 말이다. 창원 반송초등학교 담에 설치하려던 ‘세월호 기억의 벽’을 옮기게 만든 명분이다. “그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는 우리 자식과 손자, 후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서는 안된다.” 8월14일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한 말이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남긴 죄과와 일본 전후세대는 무관하다는 명목이다. 이들이 말하는 ‘기억’과 ‘사죄’는 무엇인가. 앞말에서 ‘아픔과 슬픈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과 상반된다. 박준 도의원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과 기억을 되새기”는 취지는 좋다고 했으..
지난주에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은 “창조적 파괴 수준”의 ‘국가 리빌딩’을 주문했다. 지난달엔 새정치민주연합 조국 혁신위원이 당에 필요한 것은 “자멸적 안주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고 단언했다. 석 달 전엔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보수와 진보 진영의 창조적 파괴”를 역설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양당 체제의 “창조적 파괴”를 선언했고,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지난해 취임 후 ‘창조적 파괴’론을 들며 “도지사부터 바뀌고 기득권도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근래 들어 정치지도자들의 ‘창조적 파괴’ 애용이 부쩍 늘어났다. 이 유행어의 기원은 알려진 대로 경제학이다. 단적으로 5년간 40조원을 투자하는 정부의 ‘창조경제 생태계 조성’에 따라 17개 대기업이 참여한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성공 열쇠말이 ..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듣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듣는 동안에도 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었고 살기 힘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죽어서야 불쑥 찾아온다. 이런 갑작스러운 부고는 단절과 고립의 시공간에 쌓였을 그의 복잡한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 이 현실에 연루됐거나 가담했던 나의 현실과 그 얼개이자 총체인 사회는 응당 미궁으로 빠지고 망각으로 탈출한다. 이 미궁의 어둠은 끝없고 망각의 고삐도 풀려 있어 속절없는 죽음의 풍문은 수시로 내 관계망을 가로지르며 말없이 사라진다. 지난해 5월 KBS에서 방영된 는 2013년 현재 고독사한 사람이 1만1002명이라고 보도했다. 이 집계는 변변한 정부 통계가 없어 제작팀이 추정한 것이다. 정부 통계가 잡은 ‘명백한’ 고독사는 보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