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인지 같은 날이었다. 지난 7일 군인을 천직으로 여겼던 두 청년의 죽음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죽음으로 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이예람 공군 중사에 대한 국방부의 최종 수사 결과 발표와 성전환 수술 뒤 군에서 강제 전역을 당한 고 변희수 전 하사가 낸 전역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1심 승소를 했다는 소식이 동시에 전해졌다. 절망하며 죽어가는 군인조차 끌어안지 못하는 대한민국 군대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돌아본 날이다. 공군 성폭력 피해자로 불렸던 이예람 중사의 이름이 알려진 건 지난달 28일이었다. 사랑하는 딸이 지난 5월21일 사망한 후 130일째. 군 당국의 최종 수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아버지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딸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냈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잘못한 자들이 모두..
여의도 국회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한국 정치의 본질은 투쟁이며, 대화와 타협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한된 권력을 두고 여러 세력이 다투는 정치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한국의 정치토양은 특히 척박하다. 영원할 줄 알았던 보수의 시대는 탄핵으로 허물어졌지만, 좀 다를 줄 알았던 진보세력도 민주를 외쳤던 과거를 잊은 듯 독주한다. 요즘의 정치세계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의 룰에 의해 움직여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이런 난장판 선거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선판이 여야 유력 주자와 연관된 대형 스캔들로 온통 뒤덮였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얽힌 대장동 개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겨냥한 고발 사주 의혹은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다. 당장 막바지에 이른 더불어민주당 경..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기업인 페이스북이 한 걸음 물러서기는 했다. 자회사 인스타그램의 13세 미만 어린이용 버전 개발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인스타그램이 청소년 정신건강에 유해하다는 내부 연구 결과를 익히 알면서도 이를 무시·방관해왔다”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폭로 이후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의회 청문회까지 소집되자 꼬리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린이용 인스타그램 개발이 좋은 일이고 올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왜 어린이들까지 소셜미디어로 데려오려는 걸까. 그들 말대로, 어린이들은 광고 없는 청정한 앱에서 놀고 부모는 자녀의 소셜미디어 활동을 유효적절히 지켜보도록 하기 위한 것일까.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탐사보도를 통해 페이스북의 악덕한 실체를 고발했다. 청소년 사용자들..
작가 존 스타인벡은 1960년 9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미국을 일주하는 자동차 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58세 때다. 75일간의 여행 막바지에 스타인벡은 뉴올리언스의 한 초등학교를 찾는다. 날마다 대서특필되던 흑인 등교 반대 시위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서다. 그해 2월 뉴올리언스 교육당국은 흑백 통합교육을 결정한다. 6년 전 연방대법원의 기념비적 판결인 흑백 간 학교 분리 배정 위헌 판결에 따른 것이다. 11월14일 6세 흑인 여자아이(미 흑인 민권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루비 브리지스)의 역사적인 등교가 시작된다. 맞불 반대 시위도 벌어진다.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백인 주부들이다. ‘응원단’으로 불리는 이들은 욕설과 야유로 유명하다. 오전 9시 정각 흑인 여자아이는 법원 집행관 4명의 호위를 받으..
또다시 정권 말 교육현장의 대공사가 시작됐다. 학교 현장에선 고교학점제발 태풍이 한바탕 몰아닥칠 기세다.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한 ‘2022 교육과정 개편’이 올 하반기에 시작돼 연내에 교육과정 주요 사항 발표, 내년엔 개정 교육과정 고시, 2024년 2월 ‘2028 대입제도 개편안’ 발표 등이 이어진다. 한동안 얼마나 시끄러울지 한숨부터 나온다. 지난달 교육부의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을 위한 단계적 이행 계획’ 발표를 보면서도 한숨이 더해졌다. 단계적 이행이라지만, 고교학점제의 도입시기를 현재 중학교 2학년이 고교에 진학하는 2023년부터로 사실상 2년 앞당겼다. 불과 6개월 전인 지난 2월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 발표 때만 해도 “현 초6 학년생이 고교생이 되는 2025년 전면 적용”을..
아무리 낡고, 국민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판이라지만, 과거 대통령 선거 때는 최소한의 기본 선은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선거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었고, 유력 후보들이 내세운 국가비전을 둘러싼 토론도 벌어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 권위주의와 군부독재 잔재 타파 등의 대의가 있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와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워 바람을 일으켰다. 하다못해 이명박 전 대통령도 “(나처럼) 부자 만들어 드릴게요”라는 메시지로 표심을 홀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를 외쳤다. 그런데 지금 정치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내년 3월 대선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어떤 선거가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다. 여권은 실체도 불분명해진 개..
가짜뉴스. 이제는 누구나 입에 올리는 단어가 됐다. 그만큼 세상에 널리 퍼져 있고,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실제로 얼마나 그런지는 따로 따져볼 문제다. 그와 무관하게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근래에 접한 가짜뉴스의 사례를 들어보라 하면 대다수가 별 어려움 없이 답할 터이다. 언론 보도뿐 아니라 유튜버나 온라인 커뮤니티의 얘기, 정치인의 목소리에다 오가다 들은 헛소문이나 괴담류까지 망라될 것이다. 그런데, 믿지 못할 혹은 믿어서는 안 될 메시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형식과 내용은 제각각이다. 과연 가짜뉴스란 무엇일까. 이른바 가짜뉴스는 시민사회에 해롭다. 구성원과 사회 전체에 피해를 끼친다. 사실과 진실을 덮고 거짓 또는 왜곡된 정보를 퍼뜨려 건전한 공론 형성을..
한 여성이 휴대전화 속 사진을 보며 흐느낀다. “두 딸을 두고 왔다.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한 남성은 “고맙다”는 말을 연발한다. 또 다른 남성은 기뻐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비자 발급 서류를 담은 가방을 잃어버려서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에는 희비가 교차했다. 탈레반 재집권 후 예상되는 탄압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도착했다. 카불 함락 8일 만이다. 대부분 미 정부 협력자와 그 가족이다. 이들의 얼굴에는 안도와 함께 불안, 초조의 빛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아프간에 남겨진 이들에 비하면 행운아들이다. 이륙하는 군용기에 타려고 활주로를 달리는 시민들, 공항 철조망 너머로 던져지는 아이들…. 카불 함락 후 카불공항 상황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