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직장이 무덤으로 바뀐 것은 불과 4년 만이었다. 2017년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공군 부사관에 부푼 마음으로 임관한 스무 살 이 중사는 4년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함께 근무했던 이들은 이 중사를 남의 일까지 도맡아 했고, 한번도 본인 일을 병사에게 미룬 적 없으며, 늘 다른 이를 배려했던 성실하고 책임감 많은 직업군인으로 기억했다. “결코 관심병사일 리 없었던” 그가 비참한 낙인과 굴레 속에 스러졌다. 원치 않은 회식 자리에 불려나갔다가 부대 복귀 차량에서 선임에게 추행을 당한 3월2일부터 지옥 같은 절망 속에 혼인신고 당일 스스로 먼 길을 떠날 때까지 81일. 성추행 직후 명백한 증거까지 제시하고 스무 번이 넘도록 신고했지만, 백방으로 보낸 구조신호는 조직적 은폐에 꽉 막혔다. 도움의 손..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처럼 보수, 진보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보수는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언급하며 중국 견제에 발을 들였다고 보고 점수를 줬을 테고, 진보는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대한 미국 지지가 확인된 것에 주목했다. 중국이 ‘견제’로 간주할 만한 내용이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이 대중 외교의 변화로 비칠 만했지만 국내의 우려는 크지 않았다. 대만·남중국해를 언급했으나 중국을 지칭하지 않았고, 정부가 한·중관계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압적인 전임 대통령과 딴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능란한 환대가 한국을 저항감 없이 미국 쪽으로 한발짝 끌어당긴 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에 누적돼온 ‘중국 피로증’이 여론 지형을..
“우리는 유튜브만 믿어. 유튜브가 진실이야.” 이 말이 귓전을 때렸다.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된 대학생 손정민씨 사건을 다룬 지난달 29일 방송에서 한 시민이 외친 말이다. 사건 진상을 놓고 한 달 넘도록 시비가 끊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 말대로, 이젠 아무것도 못 믿고 유튜브만 믿는 세상이 된 걸까. 사건이 알려진 초기부터 손씨 추모와는 별개로, 사인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경찰의 초동 대처가 미흡했던 탓에 억측이 난무하고 음모론까지 횡행했다. 경찰이 이례적으로 수사 진행 상황을 공개하고 범죄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도 의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지독한 ‘불신 사회’의 모습이다. 그 불신의 배경에 유튜브가 자리잡고 있다. 근..
‘2050년까지 넷제로(net zoro).’ 현재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뜨거운 구호는 없을 듯하다. 기후변화 위기에서 인류를 구할 유일한 방안인 양 세계가 한목소리로 넷제로를 외친다. 지난 4월22일 지구의날에 열린 기후정상회의는 넷제로 경연장 같았다. 참여국마다 앞다퉈 이산화탄소(CO2) 감축 목표를 상향조정했다. 넷제로는 탄소중립과 같은 말이다. CO2 같은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고, 남은 온실가스를 흡수·제거해 실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즉 배출되는 탄소와 흡수되는 탄소를 같게 해 탄소 순배출이 0이 되는 상태다. 넷제로는 기술혁신으로 탄소를 감축하겠다는 발상이다. 바탕에 기술 만능주의가 깔려 있다. 넷제로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법하지만 우려도 크다. 넷제로에 인류의 미래를 걸..
매년 특정 시기에 맞춰 나오는 이른바 ‘캘린더성 기사’들이 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늘 무심히 넘기다가 올해는 끝내 울컥하고 말았다. 나의 현실과 미래, 청년·자녀 세대의 미래 등이 겹쳐 보여서다. 정부가 어버이날을 맞아 포상하는 효행자상 얘기다. 49회째인 올해는 101세 노모의 손과 발이 되어 정성으로 봉양한 70세 아들 택시기사가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국민포장을 수상한 60대 여성은 편찮으신 홀아버지와 형제들을 30년간 돌봐왔으며, 지적장애 아들 양육과 92세 시어머니 돌봄 등에 헌신했다. 지난해, 5년 전, 10년 전도 그리 다르지 않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전형적인 공적사항 몇 가지를 옮기면, “치매를 앓는 시부모님을 직접 봉양” “24시간 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아픈..
국민의힘의 4·7 재·보선 승리에 대해서는 ‘이제 표를 줘도 될 만한 당이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그럴듯하다. 여권에 아무리 실망했더라도 극우와 손잡은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이었다면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들이 주위에 꽤 있다. 지난해 총선 이후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행보가 당의 이미지를 중화(中和)시켰는데 그중 5·18묘지 앞 ‘무릎사죄’가 컸다. 한여름 뙤약볕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80대 노정객의 모습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역사적 사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의힘을 일으켜 세우기엔 족했다. 그가 떠났으니 ‘도로한국당’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요즘 그 당의 움직임을 보면 ‘글쎄요’다. 지난달 출판사 민족사랑방이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를 출간했다. 보수단체가 법원에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말 취임 100일을 맞아 한 의회 합동연설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모들이 싸웠던 전쟁에서 지금 복무 중인 병사들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9·11테러 때 태어나지 않은 병사들이 있다.” 아프간 전쟁이 세대를 관통할 만큼 오래됐다는 의미다. 바이든으로서는 9·11테러 20주년이 되는 올해 9월11일까지 철군하겠다고 한 보름 전 약속을 재강조한 것이다. 9·11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프간전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럼 예정대로 철군한다면 아프간전은 끝나는 걸까. 흔히 전쟁을 끝내겠다는 정치인의 약속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바이든의 철군 약속도 마찬가지다. 설사 철군하더라도 미국이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두 가지 이..
4·7 재·보궐 선거 이후 정치권이 페미니즘을 들먹이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힌다. 야당은 “민주당이 2030 남성의 표 결집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해 선거에서 참패했다(이준석 국민의힘 전 최고위원)”고 분석한다. 참패 충격에 허둥대던 여당 곳곳에선 헛발질의 연속이다. 20여년 전 위헌결정이 난 군복무 가산점제 부활을 위해 개헌을 언급하고, 군 복무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을 만들자고 한다. 남녀 군사훈련 의무 실시, 여성가족부를 청년가족부로 재편하자는 제안까지 나온다. 이들이 페미니즘의 ㅍ자라도 제대로 아는지 의심스럽다. 19세기 여성의 참정권 쟁취 운동으로 본격화된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차별적 대우를 받아온 여성들의 권리를 찾아,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자는 성평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