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정세를 놓고 보수성향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한국도 이제 미국 쪽에 확실히 서야 할 때 아닌가. 균형외교도 좋지만 종국에는 미국과 함께 가는 게 맞지, 중국과 함께 갈 수 있나?” 그의 말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갈등의 최종단계(end state)를 미리 당겨와 당장 양자택일하라는 태도에는 위화감이 들었다. 보수논객들은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으니 균형외교를 그만 접으라고 한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미국의 중국 견제에 맞장구치자 ‘거봐라’며 한·미 동맹의 완전 복원을 외친다. 지금의 한·미관계가 복원이 필요할 만큼 손상됐다는 것인지, 문재인 정부가 ‘반미 행각’이라도 벌였다는 건지 요령부득이다. ‘퍼줬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동네에서 만난 40대 아빠가 갓 중학생이 된 아이를 독해 학원에 새로 보냈다고 말했다. 국어나 영어 학원이 아니란다. 어느 글이든 읽고 뜻을 파악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라 했다. 아이는 학교 시험을 잘 보고 싶어 이 학원 가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국어·영어 말고 수학·과학도 시험 문제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채야 풀 수 있다고 했다. 제 딴에는 과목별 공부를 열심히 해도 막상 문제를 이해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얘기였다.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사교육 과목이 또 하나 생겼나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EBS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을 보고 그 또래 아이들의 고충이 예사롭지 않음을 새삼 알았다. 어느 고등학교 2학년 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영화 의 가제가 ‘데칼코마니’였다면서 가제의 뜻을..
‘LH 분노’가 한 달째 전국을 휩쓸고 있다. 하루하루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온갖 새로운 비리 유형과 비판, 대책이 어지럽게 쏟아진다. 이 속에서 필자의 눈은 줄곧 ‘국회의원 전수조사’를 좇고 있다. 단언컨대 부동산 투기 근절의 가장 효과적이고 상징적인 돌파구는 국회의원 300명과 고위공무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전수조사’다. 그러니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래서 전수조사는요?” 어디까지 진행됐고,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LH 사태는 기본적으로 신뢰의 붕괴다. 말끝마다 신뢰와 공정을 내세웠기에 정부와 공공에 대한 배신감은 더욱 컸다.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들, 공복이라는 이들이 그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가능한 최대한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겨왔다는, 믿고 싶지 않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돈 되..
2+2 회담차 한국을 찾은 미국 국무·국방장관이 청와대를 예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들에게 “한·일관계 복원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11년 만에 미국 주요 장관들이 방한한 진짜 목적이 한·일관계 복원임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구축 중인 다자 연대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주요 장관들의 첫 순방지로 정했다는 분석대로다. 며칠 뒤 서욱 국방장관도 “한·일 안보협력이 가치 있는 자산”이라고 했다. 한·일의 불화가 북한 위협보다 더 걱정이라던 바이든 행정부로선 흐뭇해할 만한 상황 전개이다. 문제는 한·일이 미국의 한마디에 쉽사리 풀릴 사이인가 하는 점이다. 한·일관계는 갈등이 단단히 구조화돼 있다. 두 가지다. 우선 양국 간 힘의 차이가 현저히 좁혀졌다. 1965년 한·..
국가대표 배구스타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에서 시작된 학교폭력(학폭) 논란의 여진이 한 달째 이어지고 있다. 남자 배구로 불이 옮아붙더니 곧이어 야구와 축구 등 다른 스포츠로, 연예계와 일반인으로 “나도 고발한다”는 피해자들의 ‘학폭 미투’가 확산 중이다. 처음엔 폭력의 수위와 가혹함에, 나중에는 그 광범위함에 놀라고 있다. 스포츠계 학폭 논란의 근본 원인으로 성적 지상주의나 엘리트체육 문화를 꼽는 이들이 많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 꼭 이겨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데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팀 전체 성적을 좌우하면서 지도자 처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에서 감히 그들의 폭력을 문제 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체육계의 폐쇄성까지 더해지며 자매의 폭언과 폭행은 은폐되다 10년이 넘어서야 터져나왔다. ..
1980년대 중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신식국독자’(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식반’(식민지반봉건사회)인가를 둘러싼 논전이 대학가를 달궜다. 어떤 쪽이건 한국 경제가 대외종속적이고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니 변혁이 필요하다는 인식론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는 1970년대 말 불황과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를 딛고 재도약하던 참이었다. 이론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경제가 역동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으나 경제 볼륨과 역량을 키우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노동은 물론 자본도 통제하는 총력전 방식으로 ‘원시적 축적’을 꾀했다. 박정희식 국가자본주의가 막을 내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다. 김대중은 국제통화..
우리는 수많은 목록(리스트)과 함께 살아간다. 목록 중에는 순위가 매겨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순위가 없는, ‘무순’의 목록이라도 그 안에서 우선순위를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어쩌면 목록 안에 든 것만으로 우선순위에 포함된 것일지도 모른다. 똑 떨어지는 수치로 집계되는 사회통계나 경제지표, 온갖 성적 순위는 논외로 치자. 그것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좋든 싫든 접하는 목록과 순위가 무척 많다. 온라인 속 세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물건을 사거나 맛집을 고를 때를 생각해보자. 검색·추천 목록 안에서 비교해보고 결정한다. 가장 많이 팔렸거나, 평점이 높거나 하는 순위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뉴스나 유튜브·넷플릭스 콘텐츠를 볼 땐 어떤가. 누군가 친절히 제시해준 추천 목록 안에서 손쉽게 고른다. 온라인..
한 편의 동영상을 소개한다. 2분30초짜리다. 제목은 ‘살라 2032(Salla 2032)’다. 한 남성이 선크림을 바른 뒤 얼어붙은 폭포에서 스노보드를 탄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다른 남성은 차가운 호수 속으로 들어간다. 두 여성은 눈발이 날리는 속에서 배구를 한다…. 살라는 북위 66도가 넘는 북극권 핀란드에 있는 마을이다.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자칭 세계에서 가장 추운 마을답게 연평균 기온은 영하 0.4도다. 그런 살라가 2032년 하계올림픽 유치 신청을 하려 한단다. 북극권에서 하계올림픽이라니. 말도 안 된다. 살라가 하계올림픽을 신청하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지금 추세라면 11년 뒤 살라에서 눈과 얼음을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