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종종 넘어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면 웃음이 났다.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이내 울음을 터뜨렸지만, ‘걸려 넘어지는 일’은 내게 어떤 신호처럼 다가왔다. 너무 빨리 가고 있다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생각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돌부리도 있었다. 그것은 나를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들었다. 걸려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킨 이들이 있었다. 가족, 친구, 동료부터 시작해 책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생면부지의 사람들까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툭툭 털고 일어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때마다 어떤 신호가 다가왔다. 그 신호는 내게 잘 살고 있냐고 천진하게..
처음 방문한 베이커리에서 중년의 사장님이 마감 시간이라며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값을 치르고 종이가방에 빵을 담으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이 다정한 목소리로 “아가씨 짝은 왜 없냐”고 하셨다. 변화구였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좋은 분 아시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나는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정신없이 헛스윙을 했다. ‘그런 질문은 무례하세요!’라고 받아쳐야 했는데…. 괜히 넉살 좋은 척을 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을 대비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가? 그러나 나는 만루에서 뱀 같은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바닥에 배트를 쾅쾅 내리치면서 생각했다. ‘너무 직구만 연습했나….’ 씩씩대면서 거울을 봤다. 혹시 내가 짝이 없는 사람처럼 생겼나? 짝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지? 매직펌..
곧 여당이 되는 제1야당 대표는 오늘도 열심히 “나는 장애인을 혐오한 적이 없다”는 글을 SNS에 올리며 분투 중이다. 그의 글을 다시 한번 찾아보니 오늘도 역시 부지런하게 일하는 듯하다. “바쁜 출근길 시민을 볼모로 한 투쟁을 정당한 투쟁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전장연은 독선을 버려야 한다”면서 여전히 장애인 시위를 비판하느라 바쁘다. 비린내. 글에도 냄새가 있다면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냄새는 비린내일 것이다. 썩은 냄새나 구린 냄새와 달리 적당히 감췄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 그의 말은 화려한 언변과 논리로 치장했기에 언뜻 보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저를 여성 혐오자, 장애인 혐오자로 몰아도 무슨 혐오를 했는지는 설명을 못하죠.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되었을 때 언더도그마 담..
대학원 시절 내 별명은 ‘백구’였다. 그런 별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느 독일 교수님이 초청 강연 일정으로 방한하셨을 때다. 우리 지도교수님의 막역한 동료이자 연구실 선배의 유학 시절 은사이셨던 터라, 추억으로 간직할 만한 일상문화 경험을 그분께 만들어 드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노래방 방문’이었다. 강연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연구실 선후배들과 우르르 학교 후문의 노래방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어쩌지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 그 독일 교수님은 흥겨워하며 팝송을 두 곡이나 부르셨다. 후배의 3단 고음 열창과 선배들의 ‘말 달리자’ 합창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각자 돌아가며 한 곡씩은 불러야 할 듯해 나도 예약 버튼을 눌렀다. 예약된 곡 제목이 모니터..
약국에 들렀다. 코로나19 자가검사키트를 사는 사람, 만일에 대비해 상비약을 구입하는 사람,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이 조제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한겨울 추위 같은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준비할 때의 비장함, 바로잡을 때의 간절함이 물씬 느껴졌다. 마스크 안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겠으나 표정이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대비하는 사람과 수습하는 사람의 마음은 별도리 없이 복잡하다. “뭐 필요하세요?” 약사가 물었다. “소독약과 찰과상에 바르는 연고 좀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약국 안쪽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적어온 메모를 보고 종합 감기약, 인후염에 잘 듣는 약, 해열제 등을 사는 사람을 보았다. “혹시 몰라서 미리 사두는 거예요.” 약..
나는 꽤 오랫동안 ‘설농식’이란 남자의 실체를 찾고 있다. 얼굴도, 사는 곳도, 나이도 모른다. 아니 무엇보다 실존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겠다. 사람을 찾거나 알고 싶으면 일단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넣고 봐야 한다. 없다. 구글에도, 페이스북에도, 유튜브에도. ‘설 농식품’ 총매출을 알려주는 기사들만 잔뜩 나온다. 단서를 더해보고 싶어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설농식’, 어쩌면 ‘선농식’ ‘설용식’일 수도 있는 남자의 이름 세 글자뿐이다. 1990년대가 저무는 때엔 세상의 종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주 길에서 전단지를 나눠줬다. 성스러운 화풍의 표지를 펼치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사진이 있었고 ‘대기근’ ‘멸망’ 같은 단어들이 붉은 글씨로 공포를 조장했다. 단 한 번도 믿은 적은 없었지만 이상..
이 칼럼이 지면에 실릴 때면 20대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었는지 결과가 나왔을 터이다. 신문 1면에서부터 새 대통령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릴 것이고, 초박빙의 결과에 대한 분석이 분분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는 지면 한 귀퉁이에 실릴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은 글을 위해 머리를 짜내는 중이다. 유례없이 치열했던 선거가 끝난 게 다행이랄까. 선거가 있거나, 월드컵 축구가 열리거나, 국내외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출판은 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업계는 이런 일들로 가끔 특수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는데, 왜 이 업계는 늘 손해만 보고 특수는 없는가.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신문·방송에 볼 게 없어야 책이 팔린다는 얘기를 정설처럼 주고받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진실은 책이 이 사회에서 늘 서자에 불과..
“지난번에 이렇게 하니까 안 됐어.” 블록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말한다. 아이는 블록 쌓기에 여념이 없다. 무엇을 짓는 거냐고 물어도 수줍게 웃을 뿐 뾰족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냥 높이 쌓는 거야?”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아이는 다시 쌓기에 집중한다. 지난번에 블록 쌓던 시간을 헤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안 됐던 경험을. 그냥 높이 쌓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을 구현하려는 아이의 손놀림이 간절하다. 어른은 멀찌감치 서서 아이의 모습을 바라본다. 딱 저만했을 나이, 자신은 어떤 아이였을까. 유년기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느닷없이 소환된 장면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앨범에 담긴 사진처럼,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꺼내서 볼 수 있다. 환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