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월15일부터 1991년 4월3일까지 경기도 인근에서 13~71세 여성 10명을 상대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이 있었다. 수사를 통해 8차 살인사건 범인은 체포했으나 나머지 9건의 살인사건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2020년 7월2일 10여건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이춘재라는 놀라운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8차 살인도 당시 범인으로 체포된 윤모씨가 아니라 이춘재라는, 있으면 안 되는 수사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동안 눈앞이 깜깜해지고, 심하게 머리를 맞은 듯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렇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조차 수사기관과 법원이 모두 오판을 했다는 말인가? 이춘재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역시 너무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좁은 철창을 간신히 삐져나온 목소리가 숨막히게 더운 공기를 뚫고 전해졌다. 이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인 듯 이대로 살지 말자는 제안인 듯 육중하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파업 중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부지회장 유최안이 22년 경력의 용접기술로 자신을 가두고, 여섯 명의 노동자가 탱크 탑 구조물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 지도 한 달이 되어간다. 14일부터는 산업은행 앞에서 세 명의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어떤 선언이고 어떤 제안이길래. 하청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 30% 인상과 노동조합 인정이다. 30이라니, 튀는 숫자다. 물가상승률이나 기업의 영업이익 등을 고려해 소수점 아래까지 붙이는 임금인상 요구안과는 꽤 다르다. 뜻..
코로나19 확진에도 강제로 연차를 사용하라고 해요. 탈의실도 없어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비닐봉지에 담아 화장실 벽 고리에 매달아 둬요. 야간근무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중소 병·의원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이뿐만 아니다. 열악한 시설 개선을 요구한 직원에게 해고 통보하는 병원부터, 원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계약 만료일에 내보내는 병원까지. ‘모든 보건의료 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을!’을 주제로 진행된 국회 토론회에서 제기된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노동현실 때문이었을까. 참석자들의 반응은 오히려 담담했다. 중소 병·의원 노동자들 다수는 코로나19 장기화로 노동기본권의 침해부터 불이익을 경험했다. 무급휴가나 연차휴가 강제 소진부터 임금 삭감과 체불 등 형태도 다양했다. 열악한 노동조..
물가와 환율이 심상치 않다. 주식을 비롯한 자산가격 하락 추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20여년 만의 6%대 물가상승이라고 하니, 떠올리기는 싫지만 자연스럽게 20여년 전 경제위기를 상기하게 된다. 물론 섣부른 예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공동체의 트라우마로 남은 그 시기를 너무 쉽게 소환하는 것도 기꺼운 일은 아니다. 여러 위험을 지혜롭게 잘 헤쳐나갈 수 있길 막연히 기대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닥친 어려움은 엄연한 현실이고, 당장 하반기와 내년의 전망은 녹록지 않다. 문제는 항상 위기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취약계층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굳이 20여년 전 경제위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한 지난 경기침체를 상기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두 시기를 거치며..
부안의 고등학교에서 강의 의뢰가 왔다. 1년 전 본지에 ‘고창의 외로운 닭싸움’이라는 글에서 부안에 있는 동우팜테이블 자회사 ‘참프레’ 도계장에서 날아오는 악취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해도 지역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는 인연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2020년 4월, 부안군과 갯벌을 나누고 있는 인근 고창군에도 같은 회사의 닭, 오리 가공 공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으로 고창군은 발칵 뒤집혔다. 고창일반산업단지에 입주 계획을 밝힌 동우팜테이블 도축장은 부안의 것보다 훨씬 큰 규모다. 하루에 84만 마리의 닭, 오리를 잡을 수 있는 규모였고, 만약에 세워졌다면 아시아 최대의 가금류 도축시설이 되었을 것이다. 유기상 전 고창군수 재임 당시 고창군과 동우팜테이블은 주민들과 상의..
왕은 분수를 좋아했다. 궁전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하지만 왕국은 가물었다. 분수에 쓸 물이 부족했다. 신하들은 왕의 심기를 걱정했다. 이러다 금방 물이 바닥날 것이다. 분수가 마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묘책을 세웠다. 왕의 동선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왕이 지나가는 근처의 분수만 그때그때 작동시켰다. 덕분에 왕은 늘 즐거웠고, 왕궁은 물을 아낄 수 있었다. 물은 ‘적시’에 공급되었다. 풍요의 시대란다. 내 통장은 빈곤할지라도, 세상은 정말 풍요로운 것 같다. 근처 편의점에는 갖가지 물건이 24시간 대기 중이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오고,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된다. 클릭만 하면 김이 모락거리는 음식이 현관 앞까지 대령한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공연히 2인분을 시켜서, 1인분을 버리는 ..
2022년 6월21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우주로 솟구친 누리호가 지구 고도 700㎞ 궤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2010년 누리호 개발을 시작한 후 12년3개월 만에 순전히 한국 항공 기술로만 이룬 쾌거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1t 이상의 실용위성을 독자 기술로 발사할 수 있는 우주 강국이 되었다며 환호했다. 한 유력신문은 러시아의 기술을 빌려 처음 나로호를 개발할 때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무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벅찬 일이라며 감격했다. 누군가는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주도적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덕분이라며 이를 온 나라에 퍼트려야 한다고..
지난주 고용노동부에서 ‘주 52시간 상한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주 단위로 연장근로를 제한하는 현행 제도를 월 단위 제한으로 바꾸겠다는 게 골자다. 이렇게 되면 산술적으로 주 92시간까지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비판이 단박에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당시 스타트업 청년들에게 들은 얘기라며 ‘주 120시간 일할 자유’를 말하던 대목이 떠오른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시간 주권’을 중시하면서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자유, 주권. 노동자들이 원하는 바를 반영하는 것뿐이라는 식이다. 노동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면 쉽게 깨질 얘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분명히 어떤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일할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