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했다. 필자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일가친척을 만나러 갔다. 도란도란 친척과 이야기를 하던 중 동네 청년 재판이야기가 나왔다. 청년은 창업을 위해 모아둔 2000만원을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친구가 갚지 않아,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를 했다고 한다. 청년은 판결에 불복하기 위해 판결문을 읽어봤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라는 2줄이 전부였다고 했다. 친척은 이런 판결문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순간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법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법원 판사 수가 적어 하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도저도 아니면 “얼마 안 되는 소액이니 그냥 참고 살면 어때”라는 궤변을 해야..
괜찮지 않은 것들은 예전부터 괜찮지 않았다. 폭우로 침수되기 전에도 반지하는 거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다. 폭염이 아니더라도 홈리스에게 여름은 혹독하게 더웠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식량 위기를 거론하기 전에도 먹을거리 구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고, 흉작이라 걱정, 풍작이라도 걱정인 농민들 사정도 오래됐다. 사람답게 살 권리보다 시장답게 처분할 당위가 앞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군가는 이미 괜찮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갈 것 같은 불안을 안긴다. 그런 세계는 없다. 다르게 겪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비참이 무시됐기에 자연을 끊임없이 캐고 쓰고 버리는 구조도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돌보고 키우고 살리는 일이 여성에게 떠넘겨져, 사람마저 쓰고 버리..
병원 최초로 주4일 시범사업이 시작된다. 세브란스병원 노사가 병원계 최초로 주4일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교대근무와 과로에 시달리는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지난 수십년간 간호사 퇴사율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면허 자격증 등록 간호사가 39만1000명인 것에 비해 활동 간호사는 72.8%에 그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간호사 절반은 이직 경험이 있다. 저임금과 과중한 업무 때문이다. 특히 신규 간호사들이 감내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야간근무나 불규칙한 교대제 근무는 물론 인력부족으로 1주일의 여름휴가를 가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휴무 날 집에서 쉬다가도 응급상황 시 호출받는 ‘온콜’(On-call·호출대기) 등 부당한 현실은 오래..
당신은 약자인가, 동료시민인가? 복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번 대통령의 복지철학이 궁금했다. 답이 제시되었다. ‘약자복지’라고 한다. “대통령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가 진정한 약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부연하면 ‘노동조합 등으로 조직화한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 그 수혜를 입을 수 있지만,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한 이들을 살피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최근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수원 세 모녀와 같이 빈곤과 고립으로 내몰린 이들, 장애인, 다문화가족, 한부모 가족 등이 약자복지의 ‘약자’로 보인다. ‘따뜻한 보수’에 걸맞은 언어이다. 집권 100일이 지나 드디어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치복지’가 아닌 ‘약자복지’를 ..
80년대 ‘공일(휴일)’ 특유의 풍경이 있었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땡!’ 소리에 박장대소를 한다든가 권투와 씨름 생중계를 보는 풍경이 아련하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화면에 대고 “잽잽! 어퍼컷!”을 외치며 훈수를 두곤 했지만, 이제 권투경기는 올림픽 때나 볼까 말까다. 대체로 소득이 올라가면 스포츠도 큰 자본이 얽힌 종목이 인기를 끌고, 골프도 그중 하나여서 생중계도 이루어진다. 스타 골프선수들도 많은 데다 특권층만의 스포츠가 아닌 대중스포츠의 면모를 갖추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골프 치는 예능프로그램도 많아지면서 더욱 친근해졌고, 이제 회식 뒤에 노래방 코스 대신에 ‘스크린골프’ 문화도 낯설지 않다. 심지어 골프 업계는 코로나19 특수까지 누렸다. 실내 스포츠에는 여러 제약이 있던 탓에 야외활동을 할..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올리브기름이나 포도주는 아예 생각하지도 마라.”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이다. 일곱 봉인이 해제되면서 일곱 재앙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물가 폭등이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약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 밀 가격은 약 50% 상승하여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거의 매달 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통화량 증가와 공급망 충격이 주원인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후 위기로 인한 흉작,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 상승 그리고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수출 규제 등이 어지럽게 얽히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다. 우리는 종말론을 좋아한다. 아직 인류가 종말한 적은 없었지만..
한 대학이 등 떠밀려 재조사에 착수한 논문 표절 사건을 그냥 덮어버렸다. “학문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날 정도의 연구부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교수회가 전체 교수를 상대로 박사학위 논문 검증위원회 구성 찬반 투표까지 시행했지만, 이마저도 반대가 다수였다. 그러면 그렇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학문의 자율성이 전혀 없는 대학 현실이니 그럴 수밖에. 다들 혀를 차는데, 보다 못한 표절 피해자가 시정과 사과를 요청하고 나선다. 표절 당사자와 대학 당국은 마치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 전혀 응답하지 않고 깔아뭉갠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부끄러워야 마땅한데 어쩜 저렇게나 당당하지?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이러한 의아함을 풀..
며칠 전 SNS에서는 ‘심심함’이 논란이었다. 한 업체에서 행사 진행을 잘못한 탓인지 사과문을 올렸는데, 여기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쓴 게 발단이다. 사과문을 읽은 누군가들이 화를 냈다. “심심하다고? 난 하나도 안 심심한데.” 그렇다. ‘심심하다’는 말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 사달이 난 거다. 명징, 직조, 사흘, 금일, 무운이 먼저 자리잡고 있는 명예의 전당에 ‘심심’이 새로 등극한 순간이다. 곧장 문해력 문제가 제기됐다. 한자교육 부재, 독서량 부족 문제도 당연히 언급됐다. 그다음이 흥미로운데, 지적받은 사람들이 도리어 역정을 냈다. 왜 어려운 말 써서 혼란을 만드냐, 뜻은 알지만 비꼬려고 그런 거다, 물타기하지 말아라…. 상황이 이쯤 되면 반지성주의 문제도 언급된다. 최근 몇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