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선글라스 쓴 사람을 보면 재미동포를 먼저 떠올렸다. 선글라스를 쓰거나 머리에 인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부티’가 났다. 한국이 중진국 소리 듣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동포는 부자 나라에 사는 사람들로 대접 받았다.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캐나다에 40년 넘게 산 원로 동포들은 말한다. “예전에는 캐나다 이민 비자를 받으면 고등고시 합격이 부럽지 않았다.” 과거 해외동포라는 용어는 ‘선망’과 동의어였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변화한 만큼 해외동포들의 위상도 많이 바뀌었다. 이민을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하는 말들이 점차 달라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축하한다” “부럽다”는 의례적인 언급에..
선거날 아침, 온 마을이 부산스럽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오늘이 선거날이라는 안내방송이 메아리처럼 돌고 돈다. 아침나절, 면 소재지 앞이 북적거리기로는 이날만 한 날이 없다. 투표소로 쓰이는 학교 앞으로는 줄줄이 경운기가 늘어서고, 구부정한 허리로 유모차 닮은 밀차를 끌고 나온 어르신들도 둘씩 셋씩 투표소로 걷는다. 자리에 몸져누워 도통 얼굴 보기 힘들었던 할매, 할배도 누구 놉을 얻어서라도 몸을 이끌고 투표소로 나선다. 시골에 내려와서 몇 번, 투표 참관인을 했다. 참관인을 하는 사람들이건, 일을 하러 온 공무원이건, 나처럼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한둘을 빼고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없다. 투표소에 사람들이 오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인사를 하느라 이야기꽃이 피고, 추임새처럼 여즉 죽지 않고 ..
‘강연 요청’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여는 순간 동공이 흔들렸다. 딱 50분만 대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조찬강연을 해달라면서 ‘약소해서 죄송하다’는 표현과 함께 제안된 강연료는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사람들이 기업 전문강사가 되려고 기를 쓰는 이유를 알 만했다. 게다가 너무 논쟁적인 주제는 피해달라면서 평소 책에서 하던 이야기를 가볍게 언급하면 충분하다니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없다. 최저임금으로 하루 8시간씩 한 달을 일해도 벌 수 없는 금액을 1시간 만에 벌 수 있다니 어찌 호흡이 가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수락을 못했다. 하필 그날이 대학교 개강일이었다. 수업시간인 9시까지 도착할 수 없는 일정이라 아쉽지만 거절했다. 휴강의 유혹도 있었으나 내가 그래도 대학 교육자라는 사실을 차마 스스로 부정할 순 없..
3월 초 서울의 어느 일간지 기자가 연락을 해왔다. 캐나다에서 평창 패럴림픽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글을 써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대회가 임박했는데도 캐나다 공영방송 CBC는 별 언급이 없었다. 올림픽 때는 캐나다 경기뿐 아니라 주요 경기 대부분을 방송했던 CBC였다. 나는 “방송도 조용하고 해서 달리 쓸 게 없을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막상 패럴림픽이 열리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평소 습관대로 아침 6시에 텔레비전을 켰더니 패럴림픽 개회식도 올림픽과 똑같이 생중계를 했다. 번쩍거리는 화면도, 캐스터의 열띤 목소리도 올림픽 때와 다름없었다. 그날 저녁 황금시간대에 개회식을 재방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패럴림픽 방송은 아침저녁 계속되었다. 방송 시간이 올림픽에..
재미없는 질문 하나,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물건 가격은 늘 다른데 매번 손해 보며 파는 것이라며 엄살을 떠는 동네시장 노점 아저씨, 카페에 앉아 귀에 꿀물이 가득 찰 것만 같이 달콤한 말만 주고받는 시작하는 연인들, 약속한 공약의 절반만 지켜도 세상 아름다운 동네가 될 법한 엄청난 크기의 현수막 속 웃고 있는 사람들.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지만, 만약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곳은 바로 법정(法庭)이다. 진실을 찾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성스러운 법정에서 거짓말이 가장 많이 오고 간다니 조금은 아이러니 하지만, 단언컨대 영화배우보다 능숙하고, 법률가보다 논리적이며, 어린아이보다 순수한 진짜 같은 거짓말을 나는 ..
기독교 재단의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학교의 종교적 지향성이 무엇이든 나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회학을 열심히 강의했다. 학생들은 인종, 계급 나아가 ‘남녀’로 국한된 성차별에 대한 논의까지는 어떻게든 잘 듣는다. 하지만 성소수자로 논의가 확장되면 난리다. 그 공간을 홈그라운드라고 느끼는 자들의 반론은 거칠고 투박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반대하지만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앞뒤 안 맞는 말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황당함에 굳이 대꾸를 안 하면 더 날뛴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만 만드셨다”는 말이 나오면 참다못해 내가 중재한다. “여기는 주일학교가 아닌데요.” 다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사회학 수업에서조차 성적지향과 성적취향을 구분 못하고 “나는 동성애를 혐오할 자유..
토론토에 살러오고 얼마 안되어 학교 동문회 모임에 나갔다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자리에서 십수년 선배 되는 분이 미국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 자랑을 겸해 들려준 이야기였다. “우리 아이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룸메이트가 백인 여학생이라는 거야. 임시라지만 말이야. ‘문제는 없는 거야?’라고 물었다가 아들한테 창피만 당했네.” 아버지는 평범한 한국인 부모답게 대학생 남녀가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 무슨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걱정의 내용을 알아차린 아들은,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그런 일 없어요. 여자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같이 잠을 자요?” 아버지는 말했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진실의 햇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와 이어지며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견고한 장벽을 조금씩 흔들고 있다. 모든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렸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가 가해자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주었고,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침묵을 강요해왔다. 지금 드러나는 수많은 폭력이 오랫동안 은폐된 가장 큰 이유다. 같은 이유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가 여기에도 있다. 한국에 머무는 많은 이주여성이다. 얼마 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실시한 ‘이주여성 농업노동자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12.4%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