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날이 더워지고, 그만큼 시골 마을 깨어나는 시간이 빨라진다. 날 밝는 대로 몸을 놀리기 시작한 어른들, 서너 시간 꼬박 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보통 회사 출근 시간이다. 서울 살 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하기 힘든 일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꼭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으면 자명종이 없어도 눈이 떠진다. 해가 뜨거워지고 나서 일을 할라 치면, 정말 괴로우니까. “등거리를 잡아 뜯는 햇볕” 아래에서 아,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를 여름마다 몇 해 반복하고, 또 그 사이사이 어쩌다가 이른 새벽에 논밭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맞고 나면,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광주 귀농학교에서 서정홍 선생님 강연하시는 자리에 따라가게 되었다...
20XX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한국은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의료시스템도 붕괴하여 전염병도 돌았다. 하루는 정부군이 와서 사람을 끌고 갔고 하루는 반군이 나타나서 협조하지 않는 자를 죽였다. 도무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떠났다. 대사관 업무가 마비되어 비자 발급이 어려웠기에 이들은 세계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 그중 무사증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한 달간 체류할 수 있는 어느 나라의 작은 섬으로 무작정 향한 이들도 있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나라였지만 동계, 하계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유치한 경제규모 세계 11위의 나라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자신들을 내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나라는 난민법도 있..
토론토에서 자영업에 종사한 지 만 12년이 넘었다. 한국에서 첫 직장이었던 언론사 기자로 일을 한 것과 엇비슷한 시간이다. 직장인 시절 내 팔자가 이쪽 방면으로 풀려나갈 줄은 몰랐다. 하긴 내가 캐나다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새로운 직업, 그것도 외국에 살러와서 장사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다보니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일들이 여럿 있었다. 무엇보다 자영업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 참 많았다. 첫째는 장사를 하면 돈을 잘 벌 것이라는 선입견. 월급쟁이 시절, 때만 되면 통장에 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당시 자영업 종사자를 어쩌다 만나면 그들이 주로 밥값을 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잘 벌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많든 적든 주머니에 현금이 있어서 그랬다..
정문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언제보다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했다. 맞은편에는 이른 저녁부터 커피와 맥주와 자질구레한 요깃거리를 파는 노점상이 자리를 폈다. 한쪽으로 소방차, 한눈에도 놀랄 만큼 많은 정복 경찰들. 시간에 맞춰 도착한 개표소는 이미 당장이라도 당선인을 가려낼 태세로, 곧 도착할 투표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거 캠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군수 선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손에 꼽을 만큼. 그러니까 자유한국당, 혹은 그 계열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군수 후보가 나온 적이 있었나 싶었던 것이, 이곳의 현실이었다. 후보자도 갑작스럽게 결정되었고, 선거 캠프는 그보다 더 더 갑작스러운 모양새였다. 경남에 내려와 살게 된 지 10년인데, 선거 일을 거들게 되리라고는..
12년 전의 일이다.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스마트폰도 없었고 일베도 소라넷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강남역 사건 한참 전이었던 만큼 서점에 페미니즘 코너가 따로 있지도 않았다. 선거 포스터에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란 글귀를 본다는 건 상상조차 못하였던 시절이었으니 지금과는 꽤 다른 시대였나 보다. 여대에서 강의를 할 때였는데 한 학생이 수업용 인터넷 카페에 익명으로 고민을 남겼다. ‘남자 친구가 이상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내용이었다. 상대는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찍는 그런 수준의 사진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애인을 계속 사귀어야 하느냐는 거다. 음란사이트에 자기 사진이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강사에게까지 공유하는 이유는 단칼에 애인과 헤어지지 못하..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는 선생님들과 인권교육을 하면서 ‘우리는 언제 인간이 존엄하다고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관해 토론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을 위한 요양보호시설, 노숙인의 자활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시설과 같은 사회복지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상한 결론을 예상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교과서 같은 결론을 넘어 오랫동안 서로 갑론을박 토론을 이어갔다. 현장에서는 국회, 정부, 언론 등 우리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결정이 많아지고 있는 점을 가장 많이 우려했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두텁게 보장되기 위해서는 몇몇 사회복지시설이 마련하고..
마음속에서, 가난은 농민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주 가난에 찌들어서, 먹고살 걱정에 날마다 인상 쓰고 화내고 슬퍼하는 것도 농민이고. 가난한데도 늘 자기 일에 열심이고, 꿋꿋하고 활기찬 사람도 농민이고. 그리고 더 가난한 이웃들까지 챙기고, 늘 웃는 낯에 무슨 말이든 입만 열었다 하면 유머와 비유로 사람들을 웃겨재끼는 것도 농민이다. 그렇게 지금도 가난의 얼굴을 한 농민들이 시골에 살고 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것이 아니어서, 지금도 마을 할매들은 한번씩, 어린 것들 데리고 마을 한가운데 살아줘서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한다. 이사 잘 왔다 하는. 처음에는 여 들어와서 우예 먹고살꼬 하시던 양반들이 그래도 이제 그 걱정은 많이 덜으셨다. 며칠 집에 틀어박혀서 출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누군가..
1995년 1월, 드라마 는 대구에서 방송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의 화제작을 놓칠 리 없는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녹화테이프를 당당하게 유통시켰고 고등학생이었던 나도 이를 통해 작품을 접했다. 불법이지만 드라마 안에 장엄하게 펼쳐지는 ‘불법의 대한민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솔직히 국가권력이 개인의 역사에 어떻게 침투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사회에 끊임없이 상식을 요구해야 한다는 묵직한 감상은 이후 나이가 들어 재방송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었고 당시에는 드라마가 나열하는 조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렸다. 학교에는 이정재와 하나도 안 닮은 친구가 검도 목검을 들고 나타났고 나는 대구에서 정동진까지가 기차로 참으로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추억만이 이 드라마의 가치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