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겨울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빨간 신호등을 보고 교차로에 서 있을 때, 큰 지진인가 싶을 만한 소리가 났다. 잠시 정신이 없었다. 조금 지나서야 차가 들이받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 일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채로, 사고를 낸 운전자도 우리도 겉으로 보기에 심각한 부상은 없이, 차를 옮기고, 보험사를 부르고, 경찰을 부르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까지 순리대로 일 처리가 되었다. 낡은 차는 며칠 지나 결국 폐차장으로 갔고. 사고가 난 곳이 집과 멀었다. 가까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병원부터 찾았다. 엑스선 사진으로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지만, 꼼짝 못하겠다 싶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세 아이와 집에서 몇 시간 떨어진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피하고..
검찰조직의 남성들이라고 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비껴가서 성장했겠는가. 대한민국 어딜 가나 여성은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이를 비호하려는 권력과 마주한다. 그러니 당연한 소리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피해자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상식적인 말을 하면서도 당사자는 울컥거림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그만큼 비상식의 세상이었다. 기존의 판을 바꾸려면 먼저 8년이나 피해자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문화를 바로 우리가 만들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해자를 괴물로 규정하면 마음은 편하겠으나 재발을 막을 수 없다. 내 삶 안에서 괴물을 키우는 순간들이 얼마나 잦았는지를 짚어야만 큰 물줄기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누구나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인 ‘남자라서 노는 게 다르다’ ‘남자들은 좀 화끈한 면이..
16년 전 초기 이민자 시절 영어학교에서 만난 다른 나라 이민자들은 한국에서 온 나를 보고 의아해했다. “자동차 생산국에서 자동차도 못 만드는 나라로 왜 살러왔지?” 청각 장애를 가진 큰아이 교육 때문에 이민을 온 나로서는 몇 마디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다. 후진국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한국의 경제력과 교육 문화의 불균형한 발전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영어 교사는 자기 나라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실례되는 질문’ 혹은 금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대부분 나이나 종교 같은 상식적인 내용을 거론했다. 좀 특이한 것을 찾다가 나는 “한국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으면 실례가 된다”고 말했다. 모두들 놀라워하며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이 문제 역시 몇 마디로 설명하..
오늘 오후 피고인 이재용의 항소심 판결이 선고된다. 그는 지난해 8월 뇌물과 횡령, 재산국외도피 등 혐의가 일부 인정되어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해 항소심 재판을 받아왔다. 변호인과 특별검사 사이에 법리 다툼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피고인의 범죄 혐의를 인정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재용 측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 승마지원 등 삼성이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 수십억원을 제공한 것은 정당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고, 셋째 아들이었던 이건희 회장과 달리 자신은 외아들이며 삼성은 다른 기업과 달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아 경영권이 당연히 승계될 것이라 부정한 청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비정상적인 합병절차에 대해서는 ..
농협 조합장 선거를 치르고 있다. 보궐선거. 지난 조합장 선거부터 전국동시선거로 했던 것이라 예정대로라면 내년에 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 우리 지역에서 보궐선거가 시작되었다. 악양면은 모두 해서 2000가구가 조금 안 되는데, 농협 조합원은 1500명쯤이다. 네 집 가운데 세 집, 농사가 있으면 대개는 조합원이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곳 농협 조합은 규모가 작은 편이라 몇 번이나 합병 권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렇게 작은 조합인데도, 조합장이 되면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 쓰는 돈이며 부리는 사람을 따지면, 이곳 말로 ‘면장 위에 조합장’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농협이 공공기관이나 다름없다고 느낀다. 시골에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조합장 선거가 있었다. “광진아, 내..
노키즈존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자. 이들은 아이가 아니라 요즘 부모들의 인성을 탓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보거나 들었던 누군가의 추잡스러운 짓을 덧붙인 다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부터 생각하라’면서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누구도 식당에서 기저귀를 가는 부모를 두둔하지 않는다. 카페를 뛰어다니게끔 아이를 방치한 부모를 이해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도덕 준수에 예외가 없음은 당연한 것이니 누구든지 몰상식을 접하면 불편하다. 문제의 초점은 그럴 만한 이유의 유무가 아니다. ‘어떤’ 인간 때문에 모두가 도매금으로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과연 정당할까? 사람에게 예의범절을 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몇 번 그러지 못함을 증거 삼아 그럴 만한 집단 전체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
“자, 이제 마지막 기회다. 열심히 해보자. 안되면 되게 하라는 말 알지?” 고3 여름방학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이렇게 마무리하자 뒤에 앉은 친구가 말했다. “안되는 게 어떻게 돼요?” 캐나다 고속도로에서 ‘Zero Tolerance’라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이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음주·과속 운전 금지 표지판 옆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보통은 ‘무관용’이라 번역되지만 ‘안되는 건 절대 안된다’ 또는 ‘절대 안 봐준다’로 해석해야 더 실감이 난다. 평소 토론토는 서울보다 운전하기가 여러모로 편하고 수월한 도시이다. 인구 밀도가 낮고 덜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교통 법규가 비교적 ‘널널하고’ 운전자에게 자율성을 많이 보장하니 그럴 것이다. 도로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도, 유턴도 할 수 있다. 하지 ..
새해도 벌써 한 주가 지났다. 야심차게 계획한 새해 계획이 한번쯤 흔들리는 순간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더라도 필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불쑥 생기기 마련이고, 미리 계획한 일이 하루쯤 틀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은 결심이 굳지 못한 사람을 훈계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통계적으로 사흘에 한 번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 삶이므로 계획한 일을 사흘에 한번쯤 빼먹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의 한 주, 한 달, 한 해가 전혀 새로운 일 없이 미리 계획한 대로만 반복되고 있다면 이쪽이 더 걱정되는 일상이라 생각한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삶의 건강한 자유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