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7개월이 됐을 때다.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이현재 전 국무총리 주례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이 주인공으로, 재벌가 혼맥 연결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예로부터 재벌가는 사세 확장이나 ‘보험용’으로 유력 정치인, 관료 집안이나 다른 재벌과 혼사를 늘려왔다. 대표적인 재벌가 혼맥은 삼성과 중앙일보의 결합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인은 이승만 정부 때 법무·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1973년 당시 이재철 교통부 차관의 장녀 이명희씨와 결혼했다. 대한항공을 관리·감독하는 중앙부처 실세와 사돈이 된 것이다. 2~3세로 오면서 정·관계와의 ‘정략결혼’은 크게..
1998년 7월7일 이른 아침, 21세 박세리가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성큼성큼 연못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발을 물에 담근 채 기적 같은 샷을 날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했다. 이어 연장·재연장 살얼음 승부 끝에 기어이 우승을 따냈다. 미국여자프로골프 최고 권위의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 53회 대회 때 일이다. 까맣게 탄 종아리와 새하얀 맨발이 유난히 대비됐던 그 장면은 그해 정부가 제작한 ‘대한민국 50주년’ 공익광고에 들어갔다.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노래 ‘상록수’와 함께. 박세리는 올 5월 인터뷰에서 “지금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때는 진짜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20년 12월15일 새벽, 이번에는 25세 김아림이 겁 없는 도전에 나섰다. 미국 텍사스주에서 열린 75회..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밀려온다….” 시인 박노해가 1980년대 발표한 ‘시다의 꿈’을 읽다 보면, 타이밍(각성제)으로 졸음을 겨우 쫓아가며 밤새 미싱(재봉틀)을 돌리는 1970~1980년대 어린 여성 노동자의 고된 일상이 그려진다. 이 시에 곡을 붙인 같은 이름의 민중가요도 여성 독창이라야 제맛이 난다. 슬픔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걸 일깨운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이끈 건 여성노동자였다. 의류·가발 제조 등 경공업 중심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국가경제를 떠받치던 때 다수의 ‘수출역군’은 지방에서 상경한 20세 안팎의 여성 노동자였다. 근로조건은 처참했다. 1975년 여성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남성노동자의 42.2%에 불과했다. 노동기본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