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양당이 비슷하다지만 정권이 바뀌면 달라지는 사안도 많다. 출판 관련 일도 그중 하나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방부, 여성가족부, 교육 관련 부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권장 도서 목록이 있는데, 선정 위원 교체는 중요한 정치다. 이들의 안목에 따라 사병들이 내무반에서 읽는 책, 중·고등학교, 대학, 지역 도서관의 서고가 달라질 수 있다. 정권교체가 아니더라도 책은 시류에 민감하다. 자기 계발서의 범람,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여성학 고전의 재출간 붐,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효과였던 의 200만부 판매…. 책은 당대를 반영한다. 문제는 “반영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모든 언어가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해도 책은 반영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야 한다. “새로운 기업 문화를 선도하겠습니다”라는 구호는 출판사..
적대적 공존(敵對的 共存)의 전통적 모델은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이다. 국가주의나 진영 논리 등 집단 정체성을 표방한 두 세력이 적으로 대치하는 듯 보이지만, 통치 그룹 차원에서는 그들만의 공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은폐된 동맹을 말한다. 개인 간의 인간관계에서도 흔한 현상이다. 냉전(冷戰, cold war)은 미·소 중심의 언어다. 이념상의 차가운 적대가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프로즌 워(frozen war)’ 상태다. 제3세계는 양진영의 대리전, 열전(熱戰)을 치렀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전쟁이 대표적이다. 중공군, 유엔군 등 외국인을 제외하고도 한국인 520만명이 사망하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낳았다. 미·소 강대국 정치의 가장 큰 희생자는 제3세계였다. 두 번째로 한국현대..
재현물이나 현실에서 정치인, 예술가 등 유명인에게 “팬입니다”라며 악수를 청하는 장면이 나오면 불길하다. 나는 스릴러 영화의 전조를 보는 착각에 빠져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버릇이 있다. “팬이 안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식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숭배와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1961년 출간된 에드가 모랭의 는 우상의 역사로부터 시작, 현대 사회 대중문화의 정치경제학과 심리학을 다룬 역작이다. 영국의 영문 표기는 여전히 왕국인 양 ‘United Kingdom(UK)’이다. 영어의 ‘~dom’은 옛 왕국을 뜻한다. “스타덤에 올랐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오늘날 문화산업 연구에서 소비자의 주체성이 강조되면서 팬덤(fandom)이라는 말도 생겼다. 팬이 없다면 스타도 없다. 팬덤은 ..
내가 사는 서울 남서부 지역,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눈이 내린다. 양이 상당하다. 눈은 음소거 기능이 있어 주변을 조용하게 만든다. 2019년 12월 이후의 세계. 고요하고 아늑한 겨울밤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싶다. 지속될 기후위기와 대통령 선거가 겁나는 시간. 변화와 기대보다 불안한 심정,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내 친구는 50대 1인 가구 여성으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만성 질환을 20년째 앓고 있다. 거래도 없는 서울시에서 가장 공시지가가 낮은 40년 된 연립주택에 산다. 집 소유자, 한 달에 50만원 이상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매달 26만7170원의 지역보험료를 납부해왔다. 지난 8월, 5차 지원금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 ‘상위 12%’다. 이달부터 33만3240원 내라는 통지를 받았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부터 나는 한 번도 기권한 적이 없다. 기권은 ‘전두환당’에 투표하는 것보다 더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기권도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면 보이콧 운동을 조직해야지, 기권은 최악이다. 하지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투표하고 싶지 않다(이 글은 투표일 전에 썼다). 일단, 더불어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 선거의 원인인 젠더 이슈의 현실은, 성소수자 인권을 내세운 오태양 후보의 홍보물이 훼손되는 수준이다. 지금 내게 이 상황은, 마치 돈 없는 이들이 살 집을 고를 때 소음과 먼지 중 무엇을 더 견딜 수 있는지 택일하라는 것 같다. 실제 나는 먼지가 덜한 집을 택했다. 소음은 집 밖에서 일하다가 잠잘 때만 귀가하여 귀막이를 하든 견딜 방법이 있지만, 먼지는 창을 닫아도 피할 ..
논공행상(論功行賞). 요즘 말로, ‘화이트리스트’다. 원래 화이트리스트(국가)는 무역 용어로, 우대하는 상대방을 뜻하지만 최근에는 블랙리스트의 반대말로 권력자가 선호하는 인물로 통용되고 있다. 흑백, 인종주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공동체에 기여한 바의 있고 없음, 크고 작음에 따른 보상은 당연하다. 나는 이 원리가 ‘코드 인사’ ‘제 사람 챙기기’ 등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같이 일하려면 가치관이 맞아야 하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은 보호해야 한다. 이 같은 인간사의 기본 원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이 믿는 바, 즉 각자의 당파성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없다. 도와준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적’과의 협치도 좋은 방법이지만, 한국 사회..
2019년 4월24일,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에 대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두고, 당시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과 문희상 국회의장 간의 몸싸움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임 의원은 문 의장을 가로막으며 “의장님 (제게) 손대면 성희롱이에요”라고 했고, 졸지에 성 범죄자로 몰린 문 의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하면 성추행이냐”라며 임 의원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임 의원은 “성추행”이라고 주장했고, 문 의장은 “자해 공갈”이라고 맞섰다. 이후 두 사람 모두 피해자를 자처하며 입원했다. 이날 이채익 의원이 같은 당 임 의원을 두둔한답시고 한 발언은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문해력을 대변한다. 이 의원은 국회의장실을 점거한 채 열린 당 긴급의원총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키..
난 저출산이 ‘문제’라 생각지 않는다. 인간을 국력으로 보고, 젊고 건강한 노동력이 많아야 한다는 사고는 근대 남성 중심 인구학(demography)의 유산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여전한 해외 입양과 중장년 실업을 생각할 때, 저출산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남한의 인구 밀도는 OECD 국가 중 1위, 도시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3위다. 무엇보다 문제는 인간이 바이러스로 취급되는 시대에 전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가 해결되더라도 팬데믹이 지속되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인간의 착취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지구가 인간을 공격하는 시대, 생물체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동물학이 식물학보다 ‘우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