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송건호는 1979년,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李박사처럼 시비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지만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물도 드물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 즉 그가 미국을 협박하여 안보 자원을 얻어낸 건국의 아버지(애국자)라는 주장과 해방 후 새로운 점령자인 미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입장(사대주의자)은, 동일한 논리가 아닐까.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처럼, 그에게 미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겸사겸사 좋은 일이었다. 애국도 하고 국부로 등극했으니 말이다. 1946년 10월, 당시 이승만을 취재한 시카고 선(紙) 특파원 마크 게인의 평가대로, 그는 파쇼가 아니라 파시즘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극일을 외칠 줄은 몰랐다. 한국 정치에서 외세, 특히 일본은 단골 메뉴다. 여당이 반일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 이 효과를 잘 아는 야당은 극일과 이성적 외교를 주장해왔다. 매체가 메시지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고 들으면 모두 옳은 말씀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작동 원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두 가지가 아닐까. 적대적 공범 관계와 발전 지상주의. 적대적 공범은 분단체제에서 남북한 통치자와 여야 정치인들의 존재 양식이었다. 발전주의. 우리는 진보·보수, ‘마초·페미’ 불문, 잘사는 나라를 열망한다. 일본은 축구에서라도 이겨야 하고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다. 그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이라크 침략이든, IT 강국이든, 한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만남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내가 당황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트럼프 노벨 평화상 후보론’이고, 또 하나는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언급된 ‘문재인 대통령 조연론’이다. 일단 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권과 관련한 수많은 유엔 조약을 앞장서서 위반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말세’라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문제는 두 번째 의견이다. 여야 간 정쟁으로 치부하기엔 심각한 사안이다. 국제정치에서 ‘팩실레이터(facilitator)’는 외교력으로 국가 간 갈등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자를 말한다. 촉진자, 조력자, 주동자, 조성자 등의 뜻이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있어서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인 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호스트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 주최자, 숙주(宿主) 등의 뜻이니 조만간 ‘기생충’이란 영화도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의 주인공 부부 이름도 기택과 충숙이다. 봉 감독은 근대성, 한국 현대사,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뛰어나게 변주한다. 영화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관된 사유가 있다. 이번 작품 도 그 자장 안에 있다.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의 는 기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기생충(寄生蟲)이 아니라 기식자(寄食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대개 “기생충 같다”라고 표현하지만 기생은 생산성(환경 파괴)을 최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기생’은 오해와 낙인이 많은 단어다. 과거 기..
나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부패한 집단이 직업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냉소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 불러올 뿐이다. 통념과 달리, 정치인과 연예인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윤리적인 조건이 있다. 이들의 생활은 24시간 공중(公衆)의 감시를 받으며, 검찰을 능가하는 ‘누리꾼 수사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그러나 최근 남성 국회의장과 여성 자유한국당 의원 사이에 발생한 ‘해프닝’을 두고 여야가 서로 “피해 인정”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정치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명분과 성별 제도(gender)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은 국회일 것이다. 안건의 신속한 처리를 위한 패스트트랙에 한국당이 결사반대하면서, 국..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2절)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일까. 사랑은 짧다. 연인일 가능성이 가장 작다. ‘당신’에 정체성, 적, 상처, 습관, 질병… 어떤 단어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당신’은 내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득도하지 않고서야 ‘당신’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인생이요, 역사다. 인생고(人生苦)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알아도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멈추지 않는 상태다. 트럼프를 보면서 ‘한반도의 당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號)를, 1871년 강화도에서 미군을 물리쳤..
뭔가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도리스 레싱의 말을 빌리면, 용서란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용서도 할 수 없다.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re-member)은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환골탈태의 과정이다. 기억과 용서는 이토록 힘든 일이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지난 11일 법정에 섰다. ‘광주 학살’ 이후 39년 만이다. 치매와 감기 등의 이유로 출석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다 법원의 강제구인에 따라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에 선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80년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정치인의 활동을 봉쇄하고(김..
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이 신간 에 쓴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 진보 남성의 미투 운동에 대한 이해”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을 내내 모니터링하고 연구했다. 안씨는 1심 공판 최후 진술 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지위가 타인의 인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당시 그는 무죄를 확신한 듯 진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이 한 마디만 남겼다. 무슨 뜻일까. 진부한 비유지만,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핵심 논리이기도 한 “나는 권력자이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지위의 존재와 행사를 분리한 비문(非文)”이라는 권김현영의 분석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강제 외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