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자는 인간으로, 여자는 그 인간에 대한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왔다. 이제 우리는 ‘보편 인간’으로 상상된 남자가 아니라, 성별을 가진 존재,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인 폭력과 차별은 남자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다뤄온 사유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한계야말로 남자인 당신을 옥죄고 있는 굴레다. 남자만을 인간으로 생각한다니, 무슨 말일까? 리우 올림픽 중계 ‘막말 대잔치’를 떠올려보자. “여성 선수가 저렇게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펜싱), “살결이 야들야들하다”(유도), “○○○ 선수 착하고 활도 잘 쏘니까 일등 신붓감”(양궁). 이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여성은..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 기억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나누며 배꼽을 쥐고 웃기도 했다. 오래된 일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는 사실에 애틋해졌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서로 조금씩 달라서 더 재미있었다. 그때와 그 시절이 있었기에 이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에피소드는 끝이 없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과거를 향해 있을 때에만 행복했다. 이미 지나가버려 손쓸 수 없는 시간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다.“요새 하는 일은 잘되고 있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직장을 다니다 최근에 큰맘 먹고 사진관을 연 친구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냥 그렇지 뭐...
뭘 생각하기도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더위다. 하루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폭력적인 더위에 일종의 피서이다. 왜냐하면 많이 알려져 있듯 그의 소설은 지극히 ‘쿨’하기 때문이다. 선풍기 앞에 누워 몇 권의 하루키 소설을 훑어보면서 나는 그 쿨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 첫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에 이른 남자는 파국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혹은 바람난 아내에게도 ‘그녀의 일’이라고 덮어버린다. 또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절교를 당했는데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16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을 찾아나선다. 합리와 논리, 진실이 아닌 비합리와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몸을 차게 하는 데 도..
논란 끝에 올림픽에 참가한 박태환 선수는 아쉽게도 자유형 200m, 400m 경기에서 모두 예선 통과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 선수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몸도 괜찮았고 기록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쉬운 결과가 나왔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여론의 평가는 박했다. ‘예고된 참사’라며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돌아보면 박태환(1989년생)과 비슷한 연령대 엘리트 선수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박 선수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 우승을 시작으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비슷한 또래인 모태범(1989년생), 이상화(1990년생), 이승훈(1988년생), 김연아(1990년생) 등이 빙속, 빙상 종목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로 태어난 이들은 동양인에게 불가능할 것으..
지난 7월31일, 대학 내에 경찰병력 1600명이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의 독단적인 행정처리에 반대하면서 학교 측과 대치하고 있던 이화여대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교수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4년 있다 졸업하는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대학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스펙의 전당’에서 더 이상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그저 스펙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잊은 대학이 학생을 일개 소비자로 취급한다 하더라도 학생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래라이프’ 사업은 교육부가 진행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이다. 이화여대는 사업에 선정돼 정부로부터 35억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 살고 있니?” 이 말이 너무나 애절하고 먹먹해서 바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다소 장황하게 문자를 보냈다. 그제야 내가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한 게 애절함과 먹먹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지극히 예사로운 저 질문이 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날카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게 과연 뭘까. 잘 사는 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지금 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친구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잘 살고 싶다.” 몹시 부끄러웠다. 올해는 고등학교에 두 번 다녀왔다. 예술 고등학교에 가면 으레 시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
영국 여행 중에 리버풀에 들렀다. 과연 비틀스의 도시였다. 비틀스 거리와 존 레넌 길, 초창기 비틀스가 공연했던 캐번 펍과 곳곳의 비틀스숍, 비틀스 투어가 따로 있을 만큼 리버풀은 비틀스의 화려한 스토리텔링과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리버풀에 비틀스와 리버풀FC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노예박물관’이 있다. 비틀스의 현란한 리듬에 어지간히 취해 있던 감각을, 강풍처럼 단숨에 후려치는 공간이다.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금지법을 공포한 지 200년을 맞아 2007년에 건립한 박물관이라고 한다. 15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아메리카, 서아프리카가 어떻게 삼각형의 무역루트를 개발해 흑인을 노예로 ‘포획’하고 운반해서 팔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자랑스럽..
내가 일하는 병원은 10층짜리 상가 건물에 입주해 있다. 1, 2층에 병원, 식당 몇 곳이 있을 뿐, 3층부터 10층까지는 온통 학원이다. 영어, 수학, 국어등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학원은 물론이고 ‘브레인 컨설팅’을 한다는 영재교육센터도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어, 레고, 로봇, 프로그래밍을 교육하는 학원까지 들어섰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는 오후 2~3시경부터 건물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7시경 근처 식당에 가면 엄마와 아이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른 다시 학원에 들여보내기 전 잠깐 저녁을 먹이는 것이다. 건물 근처가 가장 번잡한 시간대는 밤 10시다. 그 시간이면 건물 앞뒤로 차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아이들을 집으로 실어나르는 셔틀버스와 부모의 차량들로 건물 근처에..